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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예술] 가학적 관음증의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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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우리는 흔히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심할수록 정신적 한계는 끝을 향하게 된다고 믿는다. '극한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극한의 정신력'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자들이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성자가 겪은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의 믿음은 더욱 숭고한 것 같이 전해진다. 또한 포로가 된 전쟁영웅이 물과 전기를 이용한 육체적인 고문과 온갖 정신적인 굴욕에도 굴하지 않으며 아군의 기밀을 적군에게 털어놓지 않았다는 식의 이야기에서, 그 고문이 기상천외하고 잔혹한 것일수록 영웅의 애국심은 더욱 빛나기 마련. 그래서 이승복 열사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뒤 공산당에 의해 입이 찢겨 죽었다는 잔혹한 이야기가 전국 각지에 일종의 미담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총알에 맞아 죽는 것보다 훨씬 잔혹한 이미지가 연상되면서 죽은 이의 영혼은 더욱 숭고하게 포장된다.

고통의 자극에 반응하는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은 더욱 고통받은 이를 더욱 숭고하게 생각한다.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욱 강렬하게 느낀다. 자극을 원하는 사람은 더한 고통을 보고자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얻는 것과 '타인이 고통 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새디스트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쉽게 즐기지 못한다. 물론 보통 사람에게도 가학적인 성향은 조금씩 있기 마련이다. 군대에서 상습적으로 후임병을 괴롭혔다거나,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며 쾌감을 느꼈다거나,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면서 체벌의 목적을 잊고 폭력 그 자체에 도취되어 버렸다거나, 애인과 싸우다 뺨을 때리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거나... 그러나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가학적 쾌감을 느꼈을지라도,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정당화하려 하며, 자신의 가학적인 쾌락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쾌락을 얻는 것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얻는 것보다 훨씬 보편적인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은 보다 쉽다. 자신이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고통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 고통을 겪는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피학적인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에게 가해진 부당한 폭력에 분노할 수도 있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대개 정당하다고 인정받고 심지어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으로 난민이 된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가해자와 가해국가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며 숭고한 감정이다.) 그러나 약자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다만 '폭력에 대한 분노'뿐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쾌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예술가들은 가학적인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이는 물론 예술가들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서양의 예술가들은 가학적인 이미지를 얻기 위해 종교, 신화, 문학 그리고 역사 등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선택했다. 그 단면에는 참혹한 사건이 무수히 많았고, 이미지의 생산자들은 과감하게 가장 극적이고 끔찍한 사건을 골라 캔버스에 옮겼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의 인물을 통해 과거의 예술가들이 표현했던 참혹을 감상하기로 하자.

 
 
프로메테우스 (Rembrandt 1606~1669)

위의 작품은 렘브란트의 것이다. 살아있는 채 간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의 초기 신 중에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은 이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티티우스, 다른 하나는 프로메테우스이다. 티티우스는 아폴로의 어머니이며 제우스의 연인이었던 레토를 범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이유로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

왜 하필 독수리인가? 독수리는 제우스의 전령이었으며, 제우스 자신이 여자(때로 남자)를 납치하고 싶을 때 독수리로 변신하기도 했던 권력자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 왜 간인가? 간은 담즙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인간의 성적인 욕구가 집중된 곳이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권력자에 의한 성적 욕구의 억제를 비유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라오콘 (El Greco 1541~1614)

프로메테우스 못지 않게 비참한 라오콘 부자를 그린 엘 그레코의 그림을 보자.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군사가 숨어있는 목마의 계책을 알고 미리 막으려고 했던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먼저 아는 자'라는 의미인 프로메테우스처럼, 라오콘 역시 미리 알 게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에는 신들이 하릴없게 인간들의 일에 참견하며, 저희들 끼리의 편나누기 싸움을 인간의 전쟁으로 확대시키는 짓거리도 종종 했다. 어떻게든 트로이를 함락하도록 도와줘야 하는 양반들 입장에서 라오콘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태양의 신 아폴론은 라오콘과 아들에게 두 마리의 뱀을 보냈고 힘없는 인간들은 비참하게 죽었다.

라오콘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꽤나 진지하다. 신과 인간의 대립, 절대자의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나약한 인간의 존재라는 묵직한 주제가 담겨있으며, 이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나타내는 정서도 비장미와 장엄이 중심을 이룬다. 고통의 이상화는 고통 받는 이들이 남성인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성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다.

이집트의 그리스 시대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의 파란만장한 생에 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당대 로마 최고의 장군과 관계했던 아름다운 여왕으로 혹은 요부의 전형으로 말이다.

클레오파트라에 관해,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기 위해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모두 죽였다고 하는 엽기적인 이야기부터, 로마 군이 성을 포위하자 시녀들과 함께 독사에 물려 이용해 자결했다는 이야기까지 많은 루머가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를 해부한 과학자들은 죽음의 원인이 독살이 아니었다고 해명한 바 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요부와 뱀이 어울린다고 느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Guido Cagnacci 1601-1681)

이 그림 속의 클레오파트라 역시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의 오른팔에 매끄러운 뱀의 몸뚱이가 감겨 있으나, 맹독이 몸에 퍼져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최고의 미녀 답게,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 자신을 보고있을 것을 예상한 듯 고혹적인 자태로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그녀는 누구를 위해 자신의 죽은 몸을 내보이는가? 이 그림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왕국의 마지막을 지켜내지 못한 채 자결한 국가의 지배자, 여왕의 모습이 아니라, 뭇 남성을 이용했으나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만 무기력한 여성의 모습이다. 그녀는 죽어 마땅하며, 스스로 택한 죽음이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담담하고 아름답게 죽어야만 한다. 사람들이 요부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남성을 고통에 빠뜨리는 과정에서, 순순히 남근을 받아들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뱀, 찌르는 칼과 창, 화살 등은 가학적인 소재이며 동시에 성적인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상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여성은 자신을 죽이는 남성 즉, 자신의 소유주인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종속된 여성의 자결은 그녀의 피학 성향을 정당화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는 이가 원하는 여성의 마조히즘 말이다.)

그런 이유로 미술사에서 자결하는 여성은 인기 있는 주제였다. 클레오파트라 만큼이나 널리 화폭에 담긴 루크레티아의 이야기를 보자.

 
 
루크레티아 (Simon Vouet 1590-1649)

로마시대의 왕 타르퀴니우스 왕가에 섹스투스라는 방탕한 아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이야기에서도 가장 방탕하고 난잡한 놈은 반드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숙한 여인을 건드린다. 루크레티아는 콜라티누스의 정숙한 아내로, 섹스투스에게 겁탈당하고 자결했다. 시몽 부에의 위 작품은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의 방에 쳐들어 와 그녀를 칼로 위협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방탕한 이들이 대개 그렇듯 섹스투스도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루크레티아에게 만약 저항한다면, 그녀와 다른 남자의 목을 벤 뒤에 둘이 간통하는 현장을 발견하여 죽였다고 말하겠노라 협박했다. 루크레티아는 강간당한 뒤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당부하는 편지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숙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자 이에 분개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했고, 결국 타르퀴니우스 왕가가 몰락하여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루크레티아의 죽음은 보다 빛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루크레티아 (Tiziano 1490~1576)

그런데 루크레티아가 섹스투스에게 위협당하는 장면을 그린 시몽 부에와 티치아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느껴진다. 어떤 차이? 위 시몽 부에의 작품에서 루크레티아는 상반신만 벗고 있고, 아래 티치아노의 작품에서는 모두 벗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원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결연함 따위는 생략되어 버린 것 같다. 분홍빛과 휘장 아래 나신으로 드러누운 루크레티아는 설령 그녀가 결사적으로 반항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쉽게 남성을 허락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와 루크레티아, 한 여인은 전형적인 요부였고 다른 여인은 정숙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티치아노의 작품에 나타난 루크레티아는 클레오파트라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고통을 거부하지 않는 여성, 마조히즘 환타지에서 파생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은 다만 신화와 고사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다. 죽음과 연결된 '육체의 고통'이라는 주제가 미술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통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수잔 손탁은 '고통 받는 육체를 보려는 욕망은 벗은 몸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라 말했다. 벌거벗은 채로 고통 받는 육체를 보면서 느끼는 어떤 충동을 성욕과 분리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는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의 양상이 시각화 되었을 때의 성적인 효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 주요태그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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젔졌 2015-12-29 16:48:36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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