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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서브컬처] 로망포르노 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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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19일. 예년의 기온을 훨씬 밑도는 혹한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동경의 패션거리 시부야마저 꽁꽁 얼리고 있었다. 시간은 밤 10시. 필자는 시부야의 언덕 아래서 불어치는 바람을 등진 채 극장「판테온」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70 mm 스크린이 설치 되었던 시부야 '판테온'의 현관 - 2003년 6월에 폐쇄됨
 
극장 앞에는 이미 장사의 진이 만들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남성으로 이루어진 그 긴 줄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더플코트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내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퇴근길에 한잔 걸치고 그 길로 달려 온 듯한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50대, 60대에 접어든 초로의 사내들. 그 속에는 20대의 젊은 남녀들도 적잖게 있어 최근에 서서히 붐 업 되고 있는 일본의 로망포르노의 열풍을 짐작 할 수 있게 하였다.
 
이윽고 차창을 검게 썬팅한 고급승용차들이 줄줄이 극장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뒷문이 열리고 하얀 종아리들이 문밖으로 나왔다. 벌써 몇 시간을 기다리던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카메라 플래시의 폭풍과 함께 터져 오르는 환호성에 종아리의 주인공들이 그 눈부신 미소를 활짝 보여준다. 순간, 시부야 도켄자카에 부는 바람마저 훈풍으로 바뀌는 듯 했다. 로망포르노 탄생30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하는 왕년의 여배우, 로망포르노의 스타들이었다.
 
가자마츠리 유키, 키노츠쿠 사에 등 수많은 남성들의 연인이었던 닛카츠의 아이돌들이 감개무량함을 애써 감추며 팬들에게 부끄러운 듯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지만 모피 코트 위로 드러난 풍만한 육체의 굴곡은 감출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들을 맞이하려 회장 안에서 나오는 면면들 역시 팬들을 환호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오누마 카츠시, 다나까 히데오, 등의 전설적인 감독들과 시나리오 라이터, 카메라 감독들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이날 다나카 감독은 '티켓 모기리(입장권의 점선 부분을 찢는 것)'를 직접 하는 팬 서비스를 하기도 하였는데 예상외의 장사진과 젊은 여성 팬들의 성원에 고무되면서도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엑스터시 나이트]라는 행사명으로 진행된 ‘니카츠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새디스틱 & 매조히스틱」이외에 몇 작품이 다음날 새벽 7시까지 상영되었다.
 
 
팬들과 스텝, 출연진은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겪어온 오랜 친구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제는 초로의 신사들이 된 팬들은 마치 소년기를 같이 보낸 불알친구를 철이 들어 동창회에서 만나듯이 서로 조금은 부끄럽고 그러나 자신들만의 비밀로 간직한 많은 추억을 되씹는 감동마저 느끼는 분위기였다.
1971년 로망포르노의 탄생은 니카츠가 그야말로 절망의 끝에서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니카츠는 동경교외에 가지고 있었던 동양최대의 촬영소마저 이미 매각한 상태였으나 여전히 700여명이나 되었던 촬영소 직원들에게 몇 달째 임금이 체불된 상태였다.
 
대영(大映)과 손을 잡고 전국 500개의 직배관을 구축한 굴지의 영화사였으며, 토오호(東屋), 쇼치쿠(松竹)과 더불어 일본 영화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통 있는 회사인 니카츠. [버마의 현금]으로 칸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미친과실] [기타를 든 철새] [큐포라가 있는 거리]등 이시하라 유지로(이시하라 동경지사의 동생)와 고바야시 아키라 등등의 스타를 키워냈던 영화 명가가 이제 스스로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영예를 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경영의 부진은 비단 니카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960년대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집집마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두게 되었고 이미 일본의 영화 산업은 오랜 정체기를 지나 쇠퇴의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니카츠(日活)의 선택은 대담하면서도 탁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있고, 대사 보다는 몸으로 말하는, 그러면서도 [영화윤리위원회]로부터 상영허가를 받을 수 있는 에로물의 제작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니카츠의 거대한 기획영화는 [로망포르노」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염두한 고육지책적, 자기비하적 용어였다.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은 당시 제작되던 일본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에로물인 ‘핑크무비’와의 차별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고 ‘포르노’라는 자극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타겟층을 확실히 하자는 의도이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로망포르노]는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에로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 니카츠의 선택이 30년 지난 오늘날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겨우 그 명예를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야시 이사오 감독의 <색력대오비화>
 
포르노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일본인들의 전통적 감정과 인간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명작들이 많았다.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몇몇 작품이 일본의 명화에 손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사실 포르노의 이름을 빌은 청춘드라마였고 시대를 풍자한 사회극적 필름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니카츠의 로망포르노는 끊임없이 표현의 자유를 위한 법적 투쟁을 펼쳐왔는데 오늘날 일본의 성적표현의 분방함을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로망포르노 소송’이 얻어낸 투쟁의 전리품이었다. 한편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을 성장시킨 일본 영화산업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국민여배우라 할 수 있는 이즈미 쥰, [셀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감독, [달은 어느 쪽에서 뜨는가?]의 최양일 감독 등도 로망포르노가 키워낸 감독들이다.
 
우리나라에는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일본의 로망포르노가 공식소개 됐다. 그리고 작년 2004년에는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로망포르노 특별전이 있었다. ‘포르노’ 라는 단어에 잔뜩 기대감을 안고 찾아간 관객들은 아마도 실망을 했을 것이고 나이 지긋한 관객들은 70~80년대 우리나라 방화의 주요장르였던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분위기와 흡사함에 놀랐을 것이다.
 
70~80년대 한국 영화는 일본의 로망포르노의 영향을 깊게 받은 작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적 존재인 [애마부인 시리즈]와 무수한 그의 아류작들도 사실은 동경애마뉴앨부인의 모방작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짙다. 동경애마뉴엘부인의 원조는 프랑의 앰마뉴엘부인이었으니 모방의 모방작인 셈이다.
 
 
어쨌든 1971년 11월 20일 [로망포르노] 제1탄이 개봉을 된다. 하야시 이사오 감독의[색력대오비화]와 니카츠의 전설적 감독 니시무라 쇼고로의 [단지처 - 늦은 오후의 정사]가 그것이다.
니카츠는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아낸 것이다.
 
니시무라 쇼고로 감독의 <단지처> 중 한 장면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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