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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예술] 팜므파탈 환타지와 여성의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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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의 허상

'욕구의 주체는 남성이다'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력은 주로 남성의 것이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다른 대답을 추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남성중심적 욕구가 투영된 이미지를 통해 매저키스트 남성의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을뿐이다.

지난 칼럼에서 19세기 말의 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매저키스트 남성의 욕망이 극적으로 구현된 이미지가 바로 팜므파탈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매저키스트 남성의 욕망, 달콤한 팜므파탈 환타지를 깨뜨리기 위해 리얼리즘의 냉소를 빌려오고자 한다.

 
 
 
Valentin de Boulogne(ca.1594-1632) [Judith]

 ㅣ 벌거벗은 유디트

구약성서의 외경 [유디트서]에는 이스라엘을 구한 여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스라엘의 성이 앗시리아 군대에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위기 상황,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망인 유디트가 하녀 하나만을 데리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거짓 투항하였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앗시리아의 장군은 매력적인 유디트에 반했고 쉽게 술에 취해버렸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방심케 한 뒤 그의 검을 뽑아 목을 베었다. 대장을 잃은 앗시리아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쳤고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돌아왔다고 한다.

유디트는 구국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무기는 오직 성적 매력뿐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녀가 이용했던 검은 홀로페르네스의 것이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던 살로메나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데릴라와 같은 악녀의 캐릭터와는 다른 측면이 있지만,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파멸하게 만드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팜므파탈 이미지로 표현되곤 했다. 따라서 유디트를 성적인 시선에서 재구성한 미술작품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Jan Massys(ca.1510-1575)
 
 
Hans Baldung, Grien(ca.1484-1545) Jan Sanders van Hemessen(ca.1500-1556)
 
 
 
Peter Paul Rubens(1577-1640) Carlo Saraceni (1579 -1620)

벌거벗은 여인, 누군가에 의해 벌거벗겨진 여인은 그를 위해 교태롭게 몸을 뒤틀고 있다. 남자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이 사악한 여인은 누구인가? 조명의 효과로 여인의 표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치명적인 위험을 부르는 존재, 하지만 그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 작품 속의 여인들의 매력적인 모습은, 결연한 여장부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이 여인들은 [유디트]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인 것 같다.

심지어 성적 매력이 추가된 유디트는 살로메의 도상과 혼동되기도 했다. 아래 프란체스코 마페이의 작품 속 인물은 유디트의 검과 살로메의 쟁반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루에 담았고, 살로메는 자신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지 않았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이 유디트인가 살로메인가의 문제는, 파노프스키가 증명하기 이전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숭고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캐릭터가 남성의 목을 잘라냈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하나의 인물, 팜므파탈의 상징으로 합쳐진 것이다.

 
 
 
Francesco Maffei(1605-1660) [Judith]

만약 논개의 영정을 그리는데 벌거벗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면, 종교보다 깊은 거룩한 분노를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연 이미지의 세계에서 여성의 숭고함(과 그밖의 권위)은 성적 매력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어째서 유디트는 벌거벗겨질 수밖에 없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남성중심적(또는 남성주체적) 시각으로 포장된 여성의 이미지와 여성중심적(또는 여성주체적) 시선으로 직시하는 여성의 이미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남성과 여성 대상의 표현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관해, 본 칼럼 2편 ‘가학적 관음증의 징후’에서 그림을 통해 언급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여성의 권력

여성의 힘, 또는 힘을 가진 여성의 존재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심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모든 소수세력이 배척당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남성의 목을 베는 여성은 배척당해야 마땅했다. 팜므파탈 이미지는 실체를 감추는 베일과 같은 것으로, 힘을 가진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부가함으로 체제전복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하드코어 포르노의 위협으로부터 도덕적인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소프트코어 포르노의 제작이 장려되었던 한국사회의 실정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력으로부터 남성중심적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악녀' 이미지가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남성중심적 시선에서 벗어난 유디트의 모습을 표현하려는 시도 역시 계속되어왔다.

 
 
 
작자미상 [Artemisia Gentileschi의 초상] c. 1614-1620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로마의 화가 오라지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여성이었기에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동료였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는 18세 되던 해에 스승으로부터 강간당했다. 성스러운 교황의 법정에서 9개월에 걸친 재판이 벌어졌고, 치열한 법정공방 중에 젠틸레스키는 무고죄의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문은 진실을 검증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는데, 젠틸레스키는 손가락을 가시로 찌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결백과 상대방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강간한 동료에게서 일종의 합의금을 받고 그를 석방시키는 데 동의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결혼시켜 버렸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으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예술세계만을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 작품은 그녀가 결혼하여 미술의 중심지 피렌체로 건너온 뒤 완성한 작품이다.

 
 
 
Artemisia Gentileschi(1593-ca.1652) Judith, 1612-21

그림 속의 유디트는 진실로 분노하고 있다. 그녀는 교태를 부리거나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장의 목을 베고 있을 뿐이다. 검을 쥐고 있는 손과 팔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로 강인한 근육이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다. 이것은 누군가를 위한 유희가 아니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도와 적장을 짓누르고 있는 하녀 역시 심각한 표정이다. 여타의 작품에서 하녀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적장의 목을 담을 자루를 들고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구석에 그려졌을 뿐이지만, 젠틸레스키의 작품에서 하녀는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이를 원하지 않는 일을 겪으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하게 바랬을 화가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페미니스트 평론가는 유디트와 하녀의 공모를 여성공동체의 의미로 설명하기도 한다.) 강간당한 여성만이 알고 있는 고통 -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던 무력한 자신에 대한 모멸감, 그런 자기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었던, 권력을 가진 남성을 향한 분노를 담고 완성한 이 작품은 다른 어느 작품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유디트를 강인한 투사로 보는가 아니면 팜므파탈로 보는가의 차이는 그 시선의 주체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로 결정되는 문제는 아닌 듯싶다. 이는 차라리 사실주의냐 이상주의냐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다. 한 사건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진실이란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상황을 직시하는 태도는 의미 있을 것이다. 아래는 젠틸레스키의 것보다 먼저 제작된 카라밧지오의 작품이다. 근대 리얼리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화가 카라밧지오가 표현한 유디트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냉정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중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디트를 꼽으라면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Michelangelo da Caravaggio(1573-1610) ca.1598

 여성에 대한 정교한 환상

구약의 외전 [다니엘서]는 정숙한 미모의 여인 수잔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남편 요나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그녀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두 명의 장로가 보게 되었다. 이 두 노인은 수잔나에게 동침을 요구하며 (쓰리썸을 제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녀가 젊은 남자와 내통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하리라 협박했다. 정숙한 아내는 당연히 노인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간통죄로 고발당해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잔나가 무죄를 호소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자 현명한 청년 다니엘이 나타나 이 사건을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관음증적인 주제로 자주 그려졌다.

 
 
 
Guido Reni(1575-1642) [Susanna and The Elders] ca.1620
 
 
 
Sebastiano Ricci(1659-1734) [Susanna and The Elders] 1713
 
 
 
Jacques Blanchard(1600-1638) [Susanna and The Elders]

위 작품들에 표현된 수잔나는 너무 당황해서인지 노인들 앞에서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로들의 권위 앞에 무력하게 몸을 맡기는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며, 오직 연민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까? 위기에 처한 여인의 가련한 나체는 이토록 아름다운데.
 
 
 
Artemisia Gentileschi [Susanna and The Elders] 1610

위의 세 작품과 아래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비교해 보자. [수잔나와 장로들]이라는 주제를 그린 작품들 속에서, 진심으로 이 상황을 거부하는 여성은 젠틸리스키의 수잔나 뿐인 듯싶다. 그리고 가장 보호받고 있는 여성도 역시 젠틸레스키의 수잔나이다. 젠틸레스키의 작품에서 수잔나의 공간과 장로들의 공간은 대리석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음탕한 손길이 곧바로 수잔나의 몸을 더듬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세 작품에서 보듯, 남성중심적 시선에서 여성은 어떤 성적인 제의도 받아들이는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남성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주체로서 느끼는 치욕감이나 공포, 혐오와 분노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주체가 아닌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매저키스트 남성의 욕망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원하는 강력한 여성, 여주인은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 역할을 수행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이다. 그녀들은 어쨌든 남성의 권력 아래 있으며, 남성을 조종하는 권력 역시 남성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 때에만 가능하다. 매저키스트 남성은 자신이 원하는 유희에 동참해 줄 매력적인 여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적 만족을 위한 역할극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자극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까지 주체가 아닌 대상이어야만 한다.


남성중심적 시선의 전복

다른 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은 다양한 것 같다. 상대를 학대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식, 그로써 대상과 주체는 격리될 수 있다. 가장 정교한 방식은 대상을 이상화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룰 예정) 여성에 대한 이상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Origin of World]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그곳에서 세상의 근원을 찾는 시선은 (검은 털로 뒤덮힌 그곳에 세상의 근원 따위는 담고 있지 않은) 여성의 입장에서 참으로 부담스러운 것이다. 이를 패러디한 오를랑의 작품으로 넘어가보자. 그녀는 남성의 그곳에 [전쟁의 근원 Origin of War]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Gustave Courbet(1819-1877) [Origin of World]/ Saint Orlan(1947-) [Origin of War]

전쟁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전통적인 역사해석-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헬레나, 은(殷)왕조의 멸망은 주왕을 부추겼던 잔인한 여인 달기 때문,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 들여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은 권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누차 이야기하지만, 죽음을 부르는 여성, 팜므파탈은 남성의 매저키스트 욕망이 반영된 환타지에 불과하다. 여성은 전쟁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음에는 노예를 주제로 그림을 읽어보고자 한다. 사디스트 욕망은 매저키스트 욕망보다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노예 이미지와 소유욕에 대해서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 주요태그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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