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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N의 이야기 - 큰 딸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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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last tango]
 
대략 몇 년전 이야기인지도 가물가물합니다.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와의 네 번째 술 자리였습니다. 매력적이고 호감 가는 성격이어서 그녀와 깊이 사귀고 싶은 욕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무척 단정한 모습이었고, 그런 모습이 좋으면서도 마냥 편하게 대하기엔 힘든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동갑이고 세 번쯤 같이 술에 취했는데도 여전히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이었다는 게 분위기 설명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이젠 아무리 술에 취해도 꼿꼿한 허리를 유지하는 그녀에게 조금씩 익숙해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데이트 하던 날도 우리는 약간의 어색함을 떨쳐내고자 열심히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도 저에게 호감이 있다고 느꼈기에, 오늘쯤은 '우리 정식으로 연애하는 사이가 되어볼래요' 하고 말하려 마음 먹고 나왔었거든요. 혹시라도 그녀도 저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금 일찍 취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단지 불필요한 말이 조금 많아질 뿐, 특별히 나쁜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기에 별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하필 '큰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약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집에서 (뒹굴거리며)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큰딸이 최고다, 남자들이여 맏이를 사귀어라' 뭐 이런 가사의 노래가 나오더란 겁니다. 그 노래가 요즘 최신 인기 가요라고 했다는데 전 전혀 들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더 큰 문제는 제가 소위 '큰딸'에 대해 감정이 안 좋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저의 큰누나는 그야말로 여자 파시스트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시험 끝나서 술 마시고 들어왔더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쩌구하며 다짜고짜 따귀부터 날리던 여자입니다. 부모님이 순하시니까 자기라도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택도 없는 사명감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른 맏이입니다. 그러면서도 매형 될 남자 앞에서는 순한 척 가식 떠는 모습에 주먹 쥐고 부르르 떨기도 했었습니다. 여튼 제가 그래서 큰누나를 증오하다보니 지금 나의 그녀의 '큰딸 찬양론'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는 게 이 분위기의 곤란한 점이었습니다.

그런 노래가 있을 리가 없다, 지은 놈이 있다면 미친 놈이거나 큰누나 없는 놈일게다, 대한민국 남동생들의 이름으로 그런 가수는 응징에 들어가야 한다 등등의 발언을 술김에 뱉었고, 그녀는 저의 이런 항변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물론 그녀도 맏이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항일겁니다.
 
안 그래도 그리 녹녹하진 않던 분위기에 갑자기 정적까지 흘러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까짓 '큰딸 찬양'에 맞장구 한번 쳐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겁니다. 그녀가 침묵을 뚫고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큰딸이란 중압감 때문에 전 머리에 풀칼라 염색도 한번 못해봤다구요.'

염색으로 화제를 넘길 수 있는 기회였기에 전 얼른 염색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염색 경험, 요즘의 염색 트랜드, 염색 잘하는 미용실 얘기 등등. 분위기가 좀 풀리는 거 같길래 친밀감의 상승을 기대하며 그녀에게 함께 염색이나 하러 가자고 제안 했습니다. 갑자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저에게 지금 뭐라고 그런 거냐며 재차 확인합니다. 다시 반복해 주었습니다. 같이 염색이나 하러 가자고..

그러자 그녀의 반응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순 양아치셨군요. 실망이에요.' 이러며 의자를 발로 차고 나가 버리는 게 아닙니까. 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의 전개에 경악했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꽉 막힌 여자라 쳐도(나중에 보니 그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깟 염색 얘기에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말투에 무슨 실수가 있었던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겐 염색과 관련된 소시적 트라우마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가 그것을 건드린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튼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거 같았고, 지금 분위기를 보자니 이대로 보내면 영영 끝일 거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별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수밖에.

바를 따라 나와서까지 죄송하다는 저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그녀는 도로변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택시가 금방 오지는 않더군요. 서로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으려니 그녀도 불편했는지 도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되는 사과에 아무 대꾸 않는 그녀에게 지친 저도 그냥 말없이 그녀를 따라 걸었습니다. 3미터쯤 되던 그녀와 저 사이엔 보기보다 훨씬 큰 거리감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한 30분쯤 둘 다 말없이 걸은 것 같습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제가 다가오길 기다리며 서 있습니다. 저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한번 사과했습니다.

' ... 그렇게까지 불쾌해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당신을 좋아하고, 호감의 연장선상에서 한 얘기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튼 제가 잘못한 것 같네요. 미안합니다.'
 
이 상황에 우울한 기분이 들던 중이었기에 제 목소리도 조금은 어두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사과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눈이 살짝 웃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밤거리를 걷다보니 화가 풀렸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제서야 제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녀가 무언가라도 말하길 기다리며 얌전히 서 있으니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어 줍니다.

'아니에요. 사실 화낼만한 얘기도 아니었는데.. 제가 좀 당황스러워서 심한 반응을 한 거 같아요. 과한 화냄에 이렇게 끝까지 따라와서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제 실수로 벌어진 상황인걸요...'
'음.. 가만히 걸으면서 생각해봤는데.. 저도 N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 ...'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자러 가요.'
' ......???'
'저... N 씨랑 자고 싶어졌다는 얘기에요.'
 
전 갑작스러운 상황의 반전에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헤어질 거처럼 냉랭하던 여자가 이번엔 좋아한다며 같이 자자니..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겨우 네 번째 만남이지만 이렇게 과감한 면이 있는 여자란 걸 상상도 못해봤기에 저의 충격과 당혹감은 더욱 컸습니다.

하지만 너그럽게 화를 풀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감격한 상태에서 감히 어떤 질문이 가능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여자가 먼저 자자고 말하는, 이 대한민국 보편정서와 어긋나는 상황. 이럴 때 잘못 혀를 놀리게 되면, 그녀의 자존심과 우리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전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며 그녀에게 한마디 질문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따라 바로 우리 앞에 보이던 모텔로 들어섰습니다. 무척 황송해하며 굽실거리는 저자세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먼저 샤워하러 들어간 그녀를 기다리며, 전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오늘 밤의 술자리에서 벌어진 이 상황에 대한 정리를 시도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혼돈이었습니다. 결국 이해하기를 포기한 저는 단지 그녀와의 이 첫날밤에만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기대하지는 못했던 상황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녀와의 이런 순간은 늘 기다려왔던 게 아니었겠습니까.

잠시 후 우린 약간의 어색함을 털어버리고자 더욱 격렬하게 서로를 안았습니다. 그녀의 수줍어하는 몸짓, 숨기지 못한 채 속삭이듯 털어놓는 낮은 신음, 그리고 깊은 곳 정열을 증명하듯 열정적으로 나를 휘감는 그녀의 손길. 그 모든 것이 나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서로 좋아하는 커플들만이 가능한 영역의 감동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우린 서로의 살갗의 부드러운 촉감을 음미하며 나란히 천정을 보면서 누웠습니다. 가만히 누워 바로 귀 옆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그녀 목소리의 감미로움이란. 그때 그녀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띄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근데.. 아까 '하고 싶어요'라고 한 거에요 아님 '자고 싶어요' 라고 한 거에요?'
'네...?'
'아까 바에서 말이에요. 푸풋'
전 가만히 바에서 했던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염색이 어쩌구저쩌구... (같이 염색) 하러 가지 않을래요?'
' ... 네?'
' 같이 하러(!) 가지 않겠냐구요.'
 
 
 
아.. 그거였습니다. 그걸 그녀는 앞뒤 맥락을 놓치고 '(섹스) 하러 가지 않겠냐’ 고 들었던 겁니다. 그제서야 그녀의 그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표정이 떠오르고, 왜 갑자기 불쾌해하며 자리를 박찼던 건지 이해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갑작스러운 동침 유혹에 그녀는 처음엔 화가 났던 거였고, 그 이후엔 공감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욕망에 대한 약간의 안쓰러움을 품은 채 이렇게 함께 자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이해한 나의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지켜보던 그녀. 결국 뭐냐고 따져 묻는 바람에 망설이다가 그냥 솔직히 얘기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녀도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잘 익은 홍시처럼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렇게 붉어진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 봤던 듯 싶기도 합니다.

결국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버렸습니다.
 
꽤 답답할텐데 30분째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 나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민망하면 저럴까 안쓰럽긴 했습니다. 그냥 내가 짐승이었던 걸로 뒤집어 쓰는 게 옳은 거였을까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글쎄요.. 그녀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나중에 자식들에게 너의 아빠가 그랬단다, 라고 얘기할 때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가혹하더라도 진실은 진실로서의 가치가 있는 법이라고 나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이불을) 들여다보며 생각 했습니다.
 
그녀를 달래기도 애매하고, 계속 그녀의 뭉쳐진 이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튀어나올 거 같아서 얼른 TV를 틀었습니다. 어색한 정적 대신 케이블 음악방송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렇게 또 몇 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그녀가 이불을 박차며 소리쳤습니다.

'앗! 저 노래에요!!'
'네..?'

대체 무엇이 그녀를 흥분케 하면서 저 부끄러움의 동굴에서 나오게 한 건지 궁금해하며 그녀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까 술자리에서 N씨가 저 노래 들어본 적 없다면서요! 큰딸이 최고다라는 노래. 바로 저거에요.'

그녀가 말한 노래는 바로...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였습니다..

'바다를 찾아가 소릴 질러봐~ 큰딸을 잡아라 빠빠빠빠~~
...나처럼 이렇게 리듬에 맞춰~ 큰딸을 잡아라 빠빠빠빠~~
...그럴땐 나처럼 툭툭 털면서~ 큰딸을 잡아라 빠빠빠빠~~ '
 
 
 
'큰딸을 잡아라' 구절이 나올 때마다 저는 폭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웃어서 숨 막히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웃어대자 오히려 그녀는 훌쩍거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가 너무나 끔찍하게 쪽팔리다면서...

저는 웃음을 멈추려 노력하며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품의 그녀는 어제와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 품에 안기어 울상 짓고 있는 이 여자는 더 이상 너무 단정해서 거리감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었던겁니다.

그때 나는 이 여자를 아주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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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록파 2017-01-10 17:41:13
ki ki ki,,,,,아주 삼빡한 스토리었습니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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