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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BDSM] 주인장과 펨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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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가? 전편에 이어 펨돔 시리즈를 계속해볼까 한다. 저번 시간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하나는 [SM은 사실 남녀차별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여성 지배자들과 남성 피지배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펨돔-멜섭의 관계도 본질적으로는 남녀차별적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오늘은 펨돔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평범한 SM 이미지 하나 찍고 넘어가자.

 

위 사진 속의 피사체-대상-는 펨돔이 아니라 펨섭이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당연히 구도의 중심에 놓여있고, 역시 당연하게 욕망이 소비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사진은 멜돔(혹은 펨섭을 사랑하는 펨돔)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런 장치에 익숙하다. 즉 어떤 이미지가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것에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에게 그림이나 사진의 구도와 포커스 따위는 거의 본능적일 만큼 자연스러운 것인 나머지, 딱히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작자의 의도에 따라 필을 받아야 할 곳에 알아서 시선이 꽂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 때, 피사체는 어떤 변화를 동반할까?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그 대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강조될 뿐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딴 얘기 좀 하면서 스무스하게 넘어가보면 어떨까. 이왕 이미지에 관해 쓰는 거, 옛날그림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에두아르 마네의 너무나 유명한 다음 그림을 보자.

 
 
 
[풀밭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캔버스에 유채

우리의 시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나체의 여자다. 풀밭 위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 중 어찌된 일인지 여자만 옷을 벗고 있다. 여자는 구도의 중심에 있으며, 혼자만 나체의 상태라는 유일성 이외에도, 그녀의 흰 피부는 나무 사이로 틈입해온 빛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매우 일상적이지만 작품의 주제는 일상적이지 않다. 마네는 말하고 있다. : 저 나체의 여자를 보라. 여신도 아니고 미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당신-남자-들이 현실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평범한 여자의, 일상 속의 누드를 보라.

이 작품을 발표한 직후 마네는 사회 각계로부터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보수적이었으니까. 그러니 그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 작품의 문제는 저 여성의 노출 수위에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시간], 아뇰로 브론치노, 1503~1572

이것은 비너스가 등장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 브론치노의 작품이다. 비너스가 아니라 마치 발정 난 봄처녀같다. 비너스와 부비부비하고 있는 영계 큐피드의 저 싱싱한 때깔을 보라. 비너스와 풀밭 위의 여인. 누가 더 관능적이고 도발적인가? 혹은 음탕한가? 마네의 작품이 그보다 300년 전에 그려진 누드보다 더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여신을 통한 절대미의 구현] 운운하는 전통적인 핑계거리를 과감히 삭제했기 때문이다(그때까지 여성 누드에서는 이런 장난질이 흔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잘 통용되었음은 물론이고.). 이제 이 그림의 비너스를 보고 ‘신화가 주는 감동’ 내지는 ‘신화로 풀어낸 인간적인 교훈’ 따위의 말로 설레발을 치는 사람은 없다. 일정부분 이상은 분명히, 관능적인 목표에 의해 그려진 관능적인 작품이고, 지금은 그런 꽁수를 써서까지 근엄할 체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마네는 직설적이었기 때문에 욕을 먹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자신들 스스로의, 솔직한 성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느꼈고 거기에서 신화의 재현이라느니 미의 추구라느니 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위안거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마네를 가만 두지 않았다. 어쨌든 마네는 다음 작품으로 더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캔버스에 유채

이 그림 [올랭피아]에서 욕망의 대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흰 침대보 위에 비스듬히 누워 관람자-욕망의 주체-를 응시하고 있는 섹시한 백인 여자다. 뒤의 배경처럼 어둡게 처리되어 있는 흑인 여자가-그리고 고양이도- 우리(남자)의 감정 속에서 성적으로 소비될 리 없다. 나른해 보이는 여자-아마도 고급 매춘부-는 이전까지의 ‘신성한 누드’에 등장했던 귀하신 분들과는 달리 아주 도발적인(직접적으로 도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목에 감긴 끈과 굽 있는 신발이 그것이다. 남성성을 자극하는 이런 요소들은 이 작품이 당시에 욕 얻어먹기 충분할 만큼 직설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뻔뻔한’ 마네의 생각은 이렇게 단순했을지도 모른다. : 새끼들 비너스는 되고 창녀는 안 된다 이거지.

어쨌든 지금은 SM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고, 마네의 작품세계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다음 두 그림을 보자. 여러분-남성 독자들-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는가?

 

 

이 두 작품의 이름은 모두 [노예시장]이다. (※두 작품은 남로당 필진 Marilyn 님의 [SM in ART]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다. 두 작품 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분의 칼럼에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남자들이 백인여성노예를 감정하고 매매하고 있다. 역시 구도의 중심에 있는 것은 두 여성 노예다. 그녀들은 홀로 밝게 빛나고 있으며-피부색 때문에라도- 상인에게는 금전적인 가치로, 구매자에게는 성적인 가치로 욕망되고 있다. 그 욕망이 남성 관객에게도 전이되고 공유됨은 물론이다.

두 작품은 명백하게 [저 아름다운 노예를 보라]고 관객을 유혹하고 있다. 뭣보다 이 여자노예들은 옷이 벗겨져 있지 않은가. 여기서 백인 남성들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일종의 젠 체를 하고 있는데, 여성을 저렇게 함부로 대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동양-비유럽-에 떠넘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동양이 아니라 서양적 미, 즉 나체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피학과 수동성까지 더한 탐스러운 서양 여성인데 말이다.

물론 이 두 그림에는 노예시장이라는 자극적인 이미지 외에도 SM적인 요소가 하나 포함되어 있다. - 노예는 옷이 벗겨져 있다. BDSM, 즉 가학과 피학의 만남에서 의복은 흔히 권력을 상징한다. 실제 벌어지는 SM 플레이에서도 섭은 돔보다 많은 시간동안 옷을 벗고 있다. 따라서 마네의 작품 속에 등장한 여성의 누드와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 [느껴라]라고 하는 명제를 말이다.

 
 

위의 패션화보 속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지젤 번천이다. 사진 속에서 그녀는 유리관 속에 전시된 채 무심한 감상-내지는 구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이미지들 속에서 그녀는 독보적으로 빛나는 중심으로, 절대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위치는 한편으로 매우 낮다. 갖혀 있는 구경거리이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의 표정이 무심하기 때문에 진짜 구경꾼들-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자극적이다. 이 이미지는 은근히, 그러나 아주 강하게 SM적이면서도 딱히 직설적으로 변태적이지 않기 때문에 무척 정교하고 치밀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젤 번천의 사진, 마네의 그림, 두 편의 [노예시장]은 분명 다른 이미지들이지만 남성의 내밀한 욕망과 악수하는 방식은 같다. 그리고 이 방식은 대부분의 펨돔 이미지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흔하디흔한 전형적인 펨돔 이미지 중 하나다. '여주인 엘렌'의 손에 들린 승마용 채찍(케인)은 적절한 때와 장소를 만난다면 가차 없이 남성 노예의 등짝을 후려칠 것이다. 그런데 엘렌은 앞모습과 뒷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성적 유희를 전제로 한 전시이며, 따라서 그녀는 포장되고 광고되며 평가되고 있다. 콜걸 카탈로그에 나올 법한 이미지다. - 엘렌이라는 상품이 당신에게 불합격일 리가 없어.
 
 

이 미스트리스는 얼굴이 없다. 분노와 경멸을 나타내는 그녀의 표정은 중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의 섹시한 S라인보다는. 왜 남성을 지배하기 위해 관능적인 코르셋과 가터벨트를 착용한 반나체 상태가 되어야 할까? 간단하다. 그것이 포르노그라피의 소비자인 남성이 원하는 것일 테니까.
 
 

위 사진에서 천에 둘둘 감긴 채(반디지) 촛농 고문(왁싱)을 당하는 남성의 자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매력적인 남성일 필요가 없고 심지어 저런 식으로 외모가 ‘봉인’되어 있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펨돔의 매력이다. 그녀는 지배, 학대행위에는 별반 쓸모가 없는 속옷차림으로 교태를 부리고 있다.

지배자로서, 타인의 피지배에 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면 될 일이지-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지배욕도 충족하면 될 일이지-, 굳이 피부 답답한 라텍스나 가죽을 뒤덮고 하이힐을 신으며 SM적 욕구와 결합된 ‘타인’의 페티시즘까지 충족시켜야 하는 펨돔은 결코 주체적인 펨돔이 아니며, ‘그들’이 원하고 ‘그들’이 조작한 ‘준비된 그녀들’이다.

가운데 놓여진, 아름다운 여자노예를 유린하는 그저 그런 생김새의 투박한 남성들. 그리고 역시 중심에 선 아름다운 여주인(미스트리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주변을 기어 다니는 전혀 멋지지 않은 외모의 남자노예들. 여기에 [미녀와 야수]를 연상케 하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일본 AV까지 생각해본다면, 이런 것들의 기저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일방적인 직선을 그리는 남자들의 판타지 말이다.

“나 같은 녀석도 저런 눈부신 미녀를 어떻게 해보고 싶군.”

 
 

페이스시팅이란 펨돔이 멜섭의 얼굴을 깔고 앉는 행위를 말한다. 두 사진속에 등장한 펨돔은 주체적인 지배자라기보다는 자극적으로 '관음되는' 육체로써 기능한다. 관능적인 뒷태와 살짝 벗겨진 팬티, 그리고 하이힐.

나는 오늘 남자들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이미지를 통해서만 펨돔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이 이미지들 속에서 여성은, 섭이든 돔이든 욕망을 위한 오브제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펨돔들은 지금 자신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많은 경우에 펨돔들이 특정한 남성들의 판타지에 의해 충분히 [설득되고 동원되는] 대상일 수 있으며, 적어도 수없이 많이 카피되고 생산되어 이제는 고착화되어버린 이미지 속에서는 확연히 그렇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여성들이 남녀차별적인 사회적 관습의 피해자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해가는 것처럼(이를테면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시어머니에 대한 전형적인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행여 내추럴 본 펨돔이 아닌 여성들도 남성들이 만들어 낸 사고방식(내지는 성적 표현방식)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역할극에 자신도 모르는 새 참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여기서, 정말로 펨돔의 성향을 성적 기질로 타고난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그들의 내적인 욕구를 무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결론을 말해보자. : 남성이 지배자가 되려고 하건 노예가 되려고 하건, 사회적인 의미로 여전히 그들은 ‘성적 주체’라는 권력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결론이 너무 위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남성들에게 반성하라거나, [여성들이여 깨어나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서로의 합의를 통해 구현되는 SM에서도 구조적인 불평등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 주요태그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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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덩어리 2014-09-09 15:53:21
아 미문이네요. 읽으면서 글쓴이의 통찰력에 감탄을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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