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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요리] 봄날은 간다 -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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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
 
1
 
나는 이 영화를 혼자 봤다. 이미 충분히 절망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웠다. 딱히 누구 때문은 아니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그렇게 '간다'고 단정돼 버린 세상의 모든 명제,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한 서글픔이 이유였다. 영화를 보고 밖에 나오니 저녁 어스름 속에 선선한 바람이 제법 불었다. 소주 한 잔이 간절했다. 동네를 휘적휘적 걸으며 누굴 꼬드겨 져넉을 때울까 궁리를 하던 차에 갑자기 P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뭐하냐?"
 
"영화 봤어."
 
"뭔 영화?"
 
"봄날은 간다."
 
"그런 영화도 있냐?"
 
헉... 먹지도 않은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확 깨는 기분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내 오늘은 이 불쌍한 영혼과 술을 먹어주리. 그리하여 P를 만나 소주 두 병을 깔끔히 비우고는 의기투합해서 같이 자기로 했다. 영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 따위는 안주거리로도 삼지 않았다. 그날 한 이야기라고는 '어머, 너 귀에 점 있다' 류의 이야기뿐이었다. 뭐 여기까지는 '혼자 멜로 영화를 본 토요일의 원나잇 스탠드'라고 분류될 만한 흔한 전개였다.
 
그런데 문제는 야심한 시각 모텔에서 발생했다. 모텔까지 와 놓고, 글쎄 P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문득 애인에게 미안해서, 라고 한다. 갑자기 미안하다니! 나한테는 안 미안하고?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그럼 자라. 집도 멀고 술도 취했고. 그냥 여기서 등 돌리고 자다가 아침에 헤어지자.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왠지 울적해졌다. 그래, 너 사랑 많이 해라. 이런 기분이랄까. 나는 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 없나, 나는 왜 맨날 '상우(유지태)'만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어쩜 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오래된 솔로의 쓸쓸한 이야기'로 정리될 터인데, 사람 사는 게 또 그렇지가 않더라. P는 새벽 3시가 넘자 애인 생각보다 여자 생각이 간절했는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뜸 바지를 벗어 던지는 게 아닌가. P가 애인에게 '은수(이영애)'가 되는 순간이었다.
 
 
2
 
전 남자 친구 K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몇 주가 지난 뒤였다.
 
그는 내게 <봄날은 간다>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용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 영화를 보고 소주 한 병을 마신 뒤 펑펑 울었노라고 말했다. 왜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은수더라."
 
누구나 한번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물었을 것이다. "내가 잘할게" 상우처럼 더듬대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흥얼거리기도 하고, 이불 속에서 쿡쿡 웃어 보기도 하고,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상우와 은수가 됐을 것이다.
 
그 후로 봄날이 여러 번 갔고, 또 왔지만 결국 은수가 되거나 아니면 상우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K에게 하고 싶었다. 너는 내게 은수였지만, 아마 상우가 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상우이기만 했을까? 나도 은수로 산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기만 하고 혹은 받기만 하고 사는 법은 없다. 줬다고 생각했지만 받았고, 받았다고 생각했건만, '어라? 쟤가 나 때문에 아팠다고?'거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도, 거만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저 이따금 '겸연쩍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K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3
 
아는 선배가 그랬다. 라면엔 계란을 넣으면 안 된다고.
 
"왜요?"
 
"그럼 너무 맛있잖아."
 
맞는 말이다. 라면은 너무 맛있으면 안 된다. 아무 것도 넣지 않은 라면이 제일이다. 먹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젓가락만 들고 뚜껑에 덜어 먹는 게 최고다. 국물은 냄비째 들고 마셔야 한다. 그것이 라면이 가진 고유의 인스턴트 맛을 극도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자는 저주를 맛봐야 한다. 저주란 다름 아니고 '너무 맛있는 라면'을 먹는 일이다.
 
K와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잠시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은수는 상우에게 "라면 먹고 가" 라고 붙잡았다. 상우가 집에 인사하러 가자고 하자 은수는 김치도 못 담근다고 한다. 그녀의 일상은 라면이다. 사랑도 그렇다. 지나치게 잘 끓인 라면도, 계란을 넣은 라면도 아닌, 그냥 그녀가 만드는 그런 라면을 원했던 것. 그런데 사랑은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다. 계란도 넣고 파도 넣고 해산물까지 넣은 너무 맛있는 라면을 만들어 보라고 유혹한다. 나는 매번 그래왔다. 덕분에 입천장이 홀랑 까졌다.
 
P와 나, P와 그의 애인, K와 나, K가 만나게 될 새로운 애인, 내가 만나게 될 새로운 애인. <봄날은 간다>를 둘러 싼 인연들이 이렇게 씨줄과 날줄로 어설프게 엮여 있지만 실은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에게 은수가 되면, 너는 다른 누군가에게 은수가 될 테니. 나는 네게 사랑한다 말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남자와 모텔에 누워 있고, 너는 내게 전화를 걸어 미안했다고 말하고, 남자는 애인을 만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끝없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 와중에 명확한 사실은 오직 한 가지다.
 
봄날은 간다는 것.
봄날은, 간다는 것.
 
 
Recipe
 
재료
 
라면 한 봉지, 물
 
 
조리 방법
 
1. 냄비에 물을 2컵 붓고 팔팔 끓인다.
 
2. 라면을 투하한다.
 
3. 식기 전에 먹는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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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블루 2019-08-21 09:15:44
라면은 젓가락만 들고 뚜껑에 덜어 먹는 게 최고라는 말에 절대공감 ㅎㅎ
개선장군 2015-07-25 15:57:13
비오는 토요일에 읽기 좋은 글이네요..
선아 2015-06-11 22:21:27
식기전에 먹는것보다 탱탱 불기전에 먹는게 저한테는 중요함 ㅎ
베베미뇽 2015-06-01 21:53:44
아 라면 먹고싶다-- 진짜 라면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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