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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넓.사.깊 1 - 칸 영화제에서 만난 헝가리 여인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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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세상은 넓고 사랑은 깊다 1 - Love on the Orient Express
 
허기진개의 ‘세상은 넓고 사랑은 깊다’ 그 첫 번째 편은 헝가리 여인과의 이야기입니다만 그 시작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칸에서 시작됩니다.
 
제목은 'Love on the Orient Express'이라고 하여 영국의 추리 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오리엔트 특급 살인)'를 약간 비틀어서 패러디한 것인데 어떤 분들이 보면 제가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사랑을 나눈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왠지 이야기의 분위기가 그와 비슷하여 붙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오리엔트 특급 타본 적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오늘 이야기에 열차를 타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오리엔트 특급
오리엔트 특급이라고 하는 열차에 대하여 말은 많이 들었는데 정확히 아시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유럽의 철도는 국경을 마구 넘나듭니다. 프랑스의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고, 게다가 실제로 국가 간의 이동에 열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북한으로 철도가 통과만 할 수 있다면 중국의 각 도시까지 철도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유럽까지도 충분히 철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리엔트 특급이란 장거리 철도 노선을 얘기하는 것인데 1883년에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노선도 꽤 많이 바뀌었는데 일반적으로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출발하여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가는 노선을 얘기합니다.
 
장거리 열차이고 또한 워낙 비싼 열차이다 보니 대부분 부유층이 이용하였고, 그에 따라 내부도 안락하고 장식이 화려하여 예전에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장거리 여행에 비행기의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1977년부터 노선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가장 먼저 터키의 이스탄불은 빠지고 프랑스의 파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노선이 축소되는 등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09년 12월 14일 공식적으로 운행을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이름이 주는 그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어느 방송사에 근무하면서 영화 및 드라마를 수입하는 업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영화제를 꽤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남프랑스의 지중해안 도시 칸에서 열리는 칸 영화제였습니다.
 
아마도 1990년대 후반의 어느 아름다운 5월 저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녀를 처음 만난 것도 칸이었습니다. 사실 제 해외 로맨스의 30% 이상은 그 시작이 칸입니다. 아무래도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사람에게 사랑의 기운을 가져다주었던 듯합니다.
 
그녀는 헝가리의 어느 조그만 다큐 영화 제작사의 평직원이었고 보스를 따라 칸에 왔다고 합니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아직 힘든 상황이었는데 마침 유럽연합에서 이러한 조그만 회사들을 위해서 싸게 부스를 빌려주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었고, 우연히 좋은 주제의 다큐 영화를 발견하고는 제가 먼저 팩스를 보내서 만나자고 했던 것이죠.
 
[여기서 잠깐!] 팩스의 노예
저와 같은 일을 하였던 선배들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텔렉스'라는 것을 이용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방송사는 어디나 보도국이 있었고 선배들은 보도국에 있는 뉴스텔렉스룸을 사용했하도 합니다. 하지만 저만 하더라도 그 세대는 아니고 팩스 세대입니다. 요즘은? 누가 팩스를 쓰겠습니까. 다들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 당시에는 팩스의 노예라고들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팩스 기계 앞에 종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고. 그 당시 팩스용지는 감열용지였기 때문에 한 1년 지나면 날아가 버려서 잘 안 보이니까 일단 한 장 한 장 복사부터 하고, 그런 다음 팩스 밑에 공람결재 고무인 찍어서 관련된 사람들 사인하고는 문서철에 끼웠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럼 하루 종일 그 팩스가 지시한 대로 행동하다가 저녁에는 그 내용을 다시 타이프쳐서 팩스 기계에 집어넣으면 하루가 끝나는, 그런 팩스의 노예들이었습니다.

 
만나서 살펴보니 상당히 좋은 영화인 것 같았고, 그쪽에서 제시하는 가격도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니라서 일단 사기로 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딜 메모(Deal Memo)를 만들어서 사인해줬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된지도 얼마 안되던 그 시절, 보스를 따라와서 처음으로 이런 자본주의 시장을 접하는 그녀의 눈에 몇천 달러를 그냥 사인하고 가는 제 모습이 조금 멋있었나 보더라구요.
 
일이 시작된 것은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일과를 마친 우리는 행사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고, 저는 조금 용기를 내어 식사 약속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달리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연히 주변에 있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간단히 와인도 조금씩 마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지중해 해변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 여행을 자주 다닐 기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칸에 온 것도 특별히 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도 직원이 일을 잘하면 해외 출장을 보내주기도 하는데 아마 그런 케이스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날 저녁에 저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녀가 바로 그 다음 날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
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저는 ‘아마 널 보고 싶을 거야(I believe I’ll miss you)’라고 말하고는 그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입술에 입 한 번 맞추고, 다시 서로 눈을 마주 보다가, 또 한 번 입술을 맞추고, 서로의 혀를 약간 교환하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저는 이미 남성으로서 여성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생겼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해외 출장 가는 거의 모두가 직장 동료와 같은 방을 써야 했기에 달리 방법도 없었던 것이죠.
 
다음날, 도무지 일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입사한 지 5년 정도 되었을 때인데 우리 차장님이랑 같이 출장 갔었습니다.
 
저희 차장님한테 솔직히 말했습니다. 나 부다페스트 갔다 오겠다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행사 마치는 날까지 니스 공항에 나타나겠다고 말했습니다(그 무렵은 핸드폰 로밍 같은 것도 전혀 없을 때라서 한번 떠나면 연락 자체가 두절되던 시대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중해의 꽃, 코트다쥐르
칸라고 하는 곳은 프랑스의 행정구역상으로 코트다쥐르 (Cote d’Azur)에 속합니다. 이 지역의 이름 자체가 ‘쪽빛 바다’ 라는 뜻으로 그 아름다운 풍광은 누구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여행을 갈 때는 아무래도 대도시 위주로 많이 가는데 프랑스의 파리에 많이 갑니다. 파리와 이곳은 900킬로미터 정도가 떨어져 있어서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죠.
 
하지만 돈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권해 드리고 싶은 지역입니다. 칸에서 자동차를 빌려서 약 30분만 가면 순정만화에 많이 나오는 니스라는 도시가 나오고, 거기서 또 30분 정도를 가면 그림 같이 아름다운 모나코가 나옵니다. 모나코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와 이태리의 국경이 나오고 바로 만나는 도시는 가요제로 유명한 상레모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 모나코와는 반대쪽으로 약 2시간을 가면 아비뇽이라는 고풍스러운 도시가 나옵니다.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 당했다가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상륙한 골프주앙, 그리고 그 나폴레옹이 첫날밤을 보냈던 성당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차장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당연히 안된다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이미 제 마음은 부다페스트를 헤매고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우리 차장님을 협박했습니다. 나 이제 곧 결혼할 것 같다고, 나 장가 못 가면 책임 질 거냐고요. 우리 차장님 참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저의 미팅계획을 다 달라고 하더니 보내주시더군요.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표 알아보니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돈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니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거기서 비행기를 갈아타서 부다페스트로 갔더니 새벽 1시에 도착하더군요. 젊을 때니까 그런 강행군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5월인데도 그날따라 부다페스트는 아주 추웠습니다. 공항에 내리니 어떤 잘생긴 남자가 저에게 접근하여 호텔을 구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갔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고풍스런 멋진 건물인데 막상 들어가 보니 방도 약간 지저분하고 결정적으로 목욕탕을 공동으로 써야 하는 호텔이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고 그냥 다른 호텔을 찾았습니다.

어차피 돈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좋은 호텔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들어가 보니 일반적인 방이 아니라 스위트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헝가리의 물가가 쌀 때라서 스위트이기는 해도 그다지 비싼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왔습니다. 부다페스트에 온 목적이 무엇이었겠어요? 당연히 전화를 해야 하는데 워낙 급한 마음에 서둘다 보니 그녀의 명함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행히 회사 이름은 기억이 나서 호텔 concierge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일하는 직원에게 당시 독일 화폐인 마르크화로 조금 팁을 주면서 회사 이름과 그녀의 이름 (성은 하도 복잡해서 기억도 나지 않고 그냥 이름이 ‘수잔’ 이라는 것만 기억하였습니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수잔.
 
전 그 회사에 수잔이 두 명일 줄은 몰랐습니다. 꼬레에서 왔다고 하니까 누군가가 전화 저편에서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 들렸습니다. 곧이어 제가 전화를 받아서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였다고 알렸습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택시 한 대가 호텔 앞에 서고 그녀가 내렸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보자마자 남들이 보든 말든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호텔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별 관심도 없는 듯하였습니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녀와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저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녀가 옷을 다 벗고, 제 옷을 다 벗기고,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만족을 느끼는 그 시점까지 어떻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지 지금도 신기할 지경입니다.
 
우리의 섹스는 아마도 칸에서 이미 시작되었던가 봅니다. 저도 20대 젊은 나이였기에 그날 우리는 무려 네 번의 사랑을 나눈 다음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그렇게 꿈 같은 이틀이 지났습니다. 저는 다시 복귀해야 합니다. 이별의 날 공항에서 애써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물이 고여 있던 그녀의 수정 같은 눈망울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저에게 너무나도 흔한, 하지만 저에게는 꿈 같던 한마디를 해 주었습니다.
 
"I love you."
 
Love on the Orient Express. 누군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을 부다페스트에서 나눈 것을 젊은 날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koreandaniel@gmail.com


세.넓.사.깊 2 - 캐나다 밴쿠버에서 만난 여자▶http://goo.gl/TYSAZj
허기진개
전 세계 67개국을 다니며 가는 곳마다 나눈 아름다운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자칭 자유주의자
 
· 주요태그 섹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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