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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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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리와 안아줘]

사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요즘에는 호캉스 라고도 한다 던데, 그때는 그냥 가까운 온천 호텔에서 쉬고 와야지 하는 마음 뿐이었다. 랜선 친구 덕에 온천 가서 실컷 지지고 오겠구나! 가서 일본 소주 홀짝 거리다가 와야지 라며, 내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고급 사치를 생각하며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페이는 내가 가는 동안 어디냐고 메일로 물어봤다. 만나게 되어서 떨린다는 소리를 계속 했었는데, 그 때만 해도 그냥 온라인 친구에서 오프라인 친구로서 처음 보는 게 떨린다는 소리로 나는 인식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MT때 한 번 와본 동네라 그런지 대충 낯이 익었다. 당시 묵었던 호텔 보다는 조금 년식이 있었지만 그래도 넓고 깨끗했다. 온천가에서 나는 특유의 유황냄새 같은 것도 은은하게 났다. 체크인을 할 때 호텔 직원이 유페이 이름으로 한 것이 맞냐고 확인했고, 나는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방은 꽤 좋았다. MT때 갔었던 그 넓은 방의 축소 버전인 듯한 다다미 방이었다. 방 자체는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테라스 쪽에 있는 1~2인용 노천탕이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수증기 때문에 뽀얗게 변한 창 밖으로 그것이 보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페이에게 도착했다고 메일을 보내고는, 가방을 내려놓고 로비로 향했다. 체크인 후에 그녀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로비로 가자 그녀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프로필 사진은 확인했기 때문에 바로 식별이 가능했다. 
 
그녀는 푸른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160정도 되는 키에, 보통 체형이었으며 강아지 상의 웃는 얼굴을 가진 아이였다. 지금 기억나는 건, 프로필 사진 보다 눈 화장이 조금 진했었다는 것 정도? 하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기에 우리는 어색함 없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팔을 벌리더니 안겼다. 
 
나는 마치 부랄을 한 대 맞은 사람 마냥 어정쩡한 자세로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녀의 포옹을 얼떨결에 받아들였다. 그녀의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했지만 대만이 원래 이런 문화인가 보다 하는 마음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와 오빠 엄청 크다! 내가 진짜 작아 보여.”
 
호텔 유리창에 비친 실루엣을 보고 그녀가 웃었다. 그녀는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시내 구경을 한다는 사실이 많이 신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호텔 문을 나섰고, 다시 센다이 시내를 향하는 버스를 탔다. 이럴 바엔 시내에서 만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일본어가 서툰 그녀가 노선을 검색하고 물어 물어 타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더구나 어디서 내려야 할 지도 모를 테니까. 
 
페이는 버스 안에서 쉴 새 없이 내게 말을 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내 지난 유학시절이 생각나며 딱하기도 했다. 물론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유학생활은 대부분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한국이 그리워질 때도 있고,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맥주를 마시던 때가 그리워 지기도 한다. 그냥 생각 없이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가서, 밤새 옛날 이야기, 여자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당구치고 들어와 다음날 까지 뻗어서 자 버리던 그런 소소한 기억들도 그리움이 되는 시기이다. 
 
물론 페이는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분명 혼자 일하는 타국 생활에 조금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나도 일본에서 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핫(?)한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센다이 역 앞에 있는 번화가에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페이는 그 곳에 데려다 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신나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이 난 얼굴로 두리번 거리는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가자며 손목을 잡아 끄는 것이 아니라, 손에 깍지를 껴서 부드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글로 설명하기는 굉장히 애매한데, 단순히 손을 잡는 것에도 은근함이 묻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때가 그랬다. 
 
“오 저건 뭐지?”
 
나는 확 하고 손을 빼기가 미안해서, 괜히 잡을 살짝 빼며 멀리 보이는 빠칭코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빼는 것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뭐가? 어떤 거?” 라며 말했지만 5분도 되지 않아 이번엔 팔짱을 꼈다.
 
사실 그녀가 못나거나 싫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때에는, 그녀와 나는 친구 이상의 시그널을 단 한 번도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정말 건전하게 일본어를 가르쳐주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했을 뿐이었다. 그냥 친근감의 표시인데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건가? 싶어서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명은 신나고 한 명은 어색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는 내내 나는 대만이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인가? 라는 무식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옷을 고르는 것을 봐 주기도 하고, Loft(일본 잡화점)에서 페이가 신나게 케릭터 볼펜 같은 것들을 사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녀는 북극곰이 달린 볼펜과 펭귄이 달린 볼펜을 하나씩 사더니, 나에게 선물이라며 펜을 주었다. 
 
“이게 뭐야?”
“오빠랑 나 같지 않아? 기념으로 사 줄게.”
“어……음……내가 살게.”
“아냐아냐. 오빠가 나 여기까지 바래다 줬으니까. “
 
나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엄청 귀엽긴 한데 내가 쓰는 것을 상상하니까 나도 토할 것만 같은 귀여움이었다. 그래도 그런 것을 챙겨주는 마음씨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고맙게 받았다. 
 
우리는 작은 이자카야에 들러 술도 시켰다. 가지고 온 디카에 실컷 사진을 찍은 그녀는, 시종일관 싱글 거리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저렇게도 좋을까. 뭔가 그 나이 또래 여자 아이의 풋풋함이 느껴져 아빠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걔 보다 두 살 많은 주제에.
 
우리는 각자 취향대로 술을 시켜서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일 혼자만 놀다가 친구가 생긴 기분이 들어서 나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서로의 언어가 다르니 심도 있는 이야기는 하기 어려웠지만, 각자 일본에 오기 전 살아왔던 이야기, 일본에 오고 난 후의 이야기 등등. 오히려 나를 깊게 아는 사람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도 가볍게 털어 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해졌다. 
 
그녀는 내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중간 중간 서로 소통이 안 될 때는 사전이 등판해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서로 의사소통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일본어에 올인하면서 영어를 많이 까먹은 듯, 나는 쉬운 단어도 생각나지 않아 버벅거리기 일쑤였고, 영어의 어순을 일본어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친절하게도 잘 알아들어 주었다. 
 
페이는 대만에 있는 국립대학교 농과대학을 휴학하고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왔다고 했다. 한국이 좋다면서 왜 일본이냐고 하니까, 한국은 워홀을 하기에 조금 힘든 나라라고 했다. 이유는 뭐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무슨말인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휴학을 한 것은 남자 친구와의 결별 때문이었다. 그녀의 엑스 남친은 프랑스 국적을 가진 대만 사람이었다고 했다. 내가 콘케츠(혼혈)? 라고 물어보니 뜻을 모르는지 갸웃 거리길래,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혼혈을 한자로 써주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한 듯했다. 연애를 하면 다 퍼주는 스타일인 모양인지 그녀의 러브 스토리는 희생과 인내의 스토리에 가까워 보였다. 결국 힘들게 하는 자신의 남친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바보 처럼 자신이 더 힘들어 했었다고 말했다. 한 달 정도를 집에서 칩거하며 울고, 다시 쓰러져서 자고를 반복하다가 일본에 오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냥 저냥 마냥 밝은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나름 아픔이 있는 아이인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페이는 눈물을 참는 듯한 얼굴을 하며 애써서 억지 미소를 짓더니, 내 연애사에 대해 물었다. 
 
“나야 뭐……”
 
사실 연애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사귀던 여자친구는 내가 일본에 오자마자 바로 남자를 갈아 치웠고, 나는 힘들어 할 틈도 없이 공부만 했고……지수를 만났고 하림이를 만났지. 나는 19금 내용만 빼고 페이에게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덧 테이블 위에 술병이 늘어났다. 아 빨리 노천 온천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버렸다. 그녀는 그제서야 “오빠 온천 들어가고 싶다고 했었지 참!” 이라며 황급히 가방에 카메라를 넣었다.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꽤 쌀쌀한 일본의 봄 기운을 느끼며,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편의점에서 온천을 하면서 마실 술을 샀고, 그녀도 더 먹고 싶다며 맥주 몇 캔을 샀다. 
 
“오빠 오늘 고마웠어!”
 
호텔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으로 돌아가면 그녀의 기숙사가 있다고 했다. 
 
“나야 말로 심심했는데 놀아줘서 고맙지. 잘 들어가!”
“응!”
 
그녀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온 나는 신나게 옷을 벗어 젖히며 사온 술들을 끌어안고 방에 있는 미닫이 창을 열었다. 노천 온천의 열기와 향이 확 하고 숨을 막히게 했다. 
 
“끄어어어어어!”
 
공기도 달빛도 차가웠지만 온천은 너무나 뜨거웠다. 천연 온천 당신은 도대체……
 
“앗 뜨……으하아아…”
 
온몸에 살이 익는 듯했지만 적응이 되니 이 보다 좋을 순 없었다. 왜 아재들이 힘든일을 마치고 사우나 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목 까지 잠길 때 까지 몸을 담그다가, 이내 하반신만 담근 형상으로 홀짝 거리며 술을 마셨다. 반은 차갑고 반은 뜨끈하고, 내 몸에 들어간 술도 뜨끈하고, 조명 대신 달빛에 의지해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술을 마시는 것은 신선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어후……”
 
다만 흠이 있다면 오래는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부랄이 익을 것 같아서 였다.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를 반복하며 온천을 했다. 잘 마시지 않는 술을 오늘 많이 마셔서, 간만에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에 있는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방안에 있던 유카타(일본식 가운)을 대충 몸에 걸쳤다. 몸이 크고 팔이 길어서 소매 자락으로 손목 이상이 튀어나오는 요상한 형상이었지만 뭐 혼자 있는데 뭐 어때 하하하하하. 
 
똑똑똑똑. 
 
정말 귀신 같은 타이밍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젠장 뭐야. 이대로 기냥 바로 침대에 고꾸라져 자려고 했는데. 
 
“오빠 자?”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을 때, 문 앞에는 페이가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어버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심해서 한 잔 더 하려고 왔어. 다른 스탭들 보면 안되니까 나 빨리!”
 
나는 유카타만 입은 것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문을 열어 주었다. 손에 맥주가 담긴 봉지를 든 그녀가 쪼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페이는 옷을 갈아입고 왔는지, 티셔츠에 편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었고, 페이는 그제서야 내 복장을 보며 조금은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할 줄 알았는데 빵 터지며 웃었다. 
 
“뭐야 그러고 있었어?”
“아니 니가 빨리 열라고 해서……”
 
내 방에서 내가 덜렁 거린다는 데 내가 왜 변명을 하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는 조금 민망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미안해. 메일 보냈는데 답이 없길래.”
“아. 온천 중이었어.”
“그랬구나. 미안미안.”
“아냐. 근데 무슨 일이야?”
“그냥 같이 마시고 싶어서. 안돼?”
“아냐. 안되긴. “
 
방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캔맥주 몇 개와, 안주로 사온 땅콩 같은 스낵들을 꺼냈다. 빤쓰라도 입어야 하나 라고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앉으면 안보일 것 같아서 나도 그녀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굉장히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해맑게 웃었다. 온천에서 신선 놀음을 하며 마셨던 술 기운이 뒤 늦게 확 하고 얼굴을 데우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가져온 맥주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 사실……일본에 와서도 많이 힘들었어.”
“왜?”
“그냥……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거울을 보면 너무 못생긴 것 같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 오니까 내가 너무 멍청한 것 같고……”

나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 지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눈물을 좀 참는 듯했는데, 지금은 숨기지 않고 손으로 닦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외로웠어. 사실 같이 온 대만 사람은 나랑 친한 것도 아니고, 성격도 잘 맞는 편도 아니거든. 그리고……”
“그리고?”
“같은 호텔 남자 직원을 기숙사에 자주 데려와.”
“아아. 둘이 사귀는 거야?”
“아마 그런 것 같아. 방문을 닫아도 소리는 들리니까. ”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맥주를 홀짝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사실 따뜻한 말을 하고 싶어도 영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뭐, 그때 하려고 했던 말을 일본어로 했어도 아마 버벅 거렸을 것이다. 
 
“음……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일본어는 금방 늘 거야. 누구나 배우는 속도는 다르니까……”
 
가까스로 머릿속 단어를 짜내어 People learns at different rates 라고 더듬 거리 듯 말했고, 그녀는 다행히도 알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외로워 하지마. 이제부터 좋은 친구 사귀고, 다시 자신감을 되찾으면 되잖아.”
 
떨어진 자존감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인지 사실 그때는 그렇게 잘 몰랐지만, 그녀 처럼 똑똑한 사람도 남자 때문에 힘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또 한 번 딱해졌다. 
 
“모르겠어. 그래도 오늘 돌아다니면서 많이 기분은 풀렸지만……그냥 모든 게 짜증났어. 내 자신이 싫어 지고, 사람이 그립고……남자랑 자 본 건 몇 달이 넘었어.”
 
아 그랬구나……라고 하려던 내 동작이 멎었다. 나만 저 소리를 듣고 뻘쭘한 건가? 페이는 내가 괜히 헛기침을 하는 것조차 인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냥 힘들어서……오빠가 온다고 했을 때 신나서 오라고 했었나봐.”
“나도 너 봐서 즐거웠어. 혼자 놀고 있었는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안아줘.”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젖었지만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은 눈으로, 그 눈에 충분히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그녀를 안아 주었다. 
 
페이는 한동안 내 품에 안겨서, 내 허리를 꽉 끌어 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녀의 작은 등을 살살 토닥여 주는 일 뿐이었다. 방 안에 아주 어색하고 고요한 침묵이 조금 흘렀을 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위로를 받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말로 위로를 해 주긴 했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서로 소통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천 마디 위로보다는 한 번의 포옹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로 차가운 감촉이 들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 목덜미를 쓰다듬더니, 이윽고 유카타 안으로 손을 넣어 내 등을 만졌다. 
 
창 밖으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그녀는 나를 조심스럽게 만지고 다독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눈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격렬히 섹스하고, 서로를 애무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조용히 안고 있을 뿐이었다. 
 
“쉬고 있었는데. 미안해.”
“괜찮아.”
 
페이는 내 옷 매무새를 여미어 주었다. 내 품에서 조금 흐느낀 듯, 눈이 또 빨갛게 젖어 있었다. 지금 누군가가 본다면 별 것 아닌 걸로 힘들어 하는 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마음의 무게에 한계가 있다. 그것이 설령 누군가에게 솜처럼 가벼울 수는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거운 법이다. 
 
우리는 선을 넘지 않았고, 그녀는 우리 사이에 경계선 과도 같은 호텔 방 문을 열고 나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는 그녀를 보며 나도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시시하고 허무 하겠지만 그녀와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어쩌면, 그날 우리가 술김에 섹스를 해버렸다면 외로움 때문에 좋은 친구를 걷어 차 버린 셈이 되었겠지. 그녀가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가기 까지,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서로 돕고 의지했다. 
 
누군가가 이 글을 보며 섹스도 안 했는데 왜 등장 시켰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나도 그건 모르겠다. 내가 일본에서 처음 사귄 외국인이 일본인이 아닌 대만인인 것이 조금 아이러니 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와 만난 이후로 내 이성관이 많이 바뀐 것도 사실이니까. 
 
어찌보면 뻔하고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앞으로는 그녀가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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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186넓은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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