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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예술] 소유의 정당화와 노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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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럼 파워스 (Hiram Powers, 1805~1873), 그리스 노예,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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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SM'은 'Bondage(구속), Domination(지배), Sadism(가학), Masochism(피학)'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S-M이라는 개인의 성향에 구속과 지배라는 권력의 개념을 포함한 것이며, 특히 가운데의 두 글자 'D-s'를 통해 Dom(dominator 지배자)과 Sub(subject 피지배자)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힘의 불균형은 성적 자극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본 칼럼의 3편 '겁탈과 폭력'은 권력 차이와 성적 지배구조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노예처럼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쾌락을 찾는데 노예가 느끼는 흥분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검은 가죽 옷, 굽 높은 에나멜 하이힐, 채찍이나 패들, 피어스와 같은 아이템의 시각적인 효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사실 애정과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편적인 의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지만 말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고행

BDSM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폭력성'과 결부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현대에서 발견한 또는 인정했다고 믿는 것은 기껏해야 폭력과 섹스의 관계다. 가학-피학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권과 종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왼쪽 그림은 카톨릭 수사들의 고행을 묘사한 장면이다. (정확하지 않지만 신비주의 계통의 삽화로 보인다.) 최근까지도 카톨릭의 수도자들은 채찍이나 매듭을 묶은 밧줄로 매를 맞는 고행을 감내해왔다. 이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죄의 유혹(주로 정욕)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채찍질을 통해 세속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고 사후에 받게 될 형벌이 줄어들 것이라 믿었다. 육체적인 고행을 통해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것을 믿었던 수도자의 예는 다른 종교에서도 흔한 것이었다. 위의 오른쪽 사진은 이슬람권에서 종교적인 채찍질 의식을 치른 후에 생긴 상처를 기록한 것이다. 모히람 기간에 독실한 성인 남성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신앙심을 입증하며 주변 사람들도 이를 돕는다. 이것 말고도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면 영혼의 정화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고행을 실천하는 종교는 많이 있다.

누군가 SM에 매료되는 것은 단순히 때리고 맞는 자극 때문만이 아니다. 때리고 맞는 일의 저변에 있는 강력한 애정과 신뢰가 더욱 중요하다. SM에 대한 욕구ㅡ소유 또는 종속에 대한 갈망ㅡ는 종교에서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은 언어로 의미화할 수 없는 영역에 걸쳐 있는지도 모르겠다.) BDSM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적어도 플레이 중에는 주인이 노예에 대해 누리는 권력이 신과 같은 것으로 격상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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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라는 주제에 매혹된 예술가는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 흘리는 나체를 보며 흥분하는 가학 성향은 사냥감의 피 냄새를 맡았을 때 포식자가 느끼는 흥분과 전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다. 노예(라는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는 마치 신이 된 것과 같은 도취를 느끼게 된다.

화가의 입장을 상상해 보자. 까다롭고 참을성은 없고요구 사항은 많은 공작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과, 이국적인 미모의 노예를 그리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즐거울지 말이다. 의지를 가지지 않는 대상(노예)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은 정물을 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지만, 그 결과물은 정물화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어쨌든 현실적인 문제 아래 깔려있는 예술가(와 예술품 소비자)의 소유욕, 노예에 대한 집착을 살펴보자.

 
 
앵그르(Ingres, 1780~1867), 루지에로와 안젤리카, 1819

루지에로와 안젤리카(Ruggiero and Angelica) 이야기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한창 대립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악의 화신인 용이 미녀 안젤리카를 납치해가자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영웅 루지에로가 출동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기독교 세력의 정의가 악의 축을 몰아내었다는 이야기다. 위의 작품은 영웅이 미녀를 구출해내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결국 영웅은 용을 무찌를 것이고 화면에서 이미 승리가 표현되고 있으므로 극적인 서사적 효과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우리의 미녀 안젤리카에게 주목해보자.
 

안젤리카는 사슬에 묶여 꼼짝하지 못하지만 교태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에게 성적인 매력은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안젤리카의 모습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이 작품에서 안젤리카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역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알고 있듯 그녀도 영웅의 승리를 믿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차라리 중요한 점은 그녀가 종속돼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에 대해 루시-스미스는 '구출은 감금의 핑계거리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녀는 용에 의해 납치되고 감금당했으며 용사에 의해 구출될 하나의 대상(object)인 것이다. 그리고 대상은 의지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의지를 가지고 있는 여성인 필자로서는, 의지가 없는 여성이 어째서 성적인 매력을 불러일으키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논지를 빌려오고자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고전적인 시선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므로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앵그르 (Ingres, 1780~1867), 오달리스크, 1839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서-동'의 경계를 긋고 그 사이의 차이점을 일종의 대립쌍, 주체-객체, 이성-감성, 합리-비합리, 논리-신비, 남성성-여성성과 같은 것으로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결코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대상화를 위한 구분법이다. 서구, 남성을 중심에 두고 동양, 여성 대상의 정체를 재구성하는 이런 이분화는 제국주의의 지배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경제적인 착취의 용이성을 획득하는 것만이 아니며,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서구, 남성의 존재 자체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이국적인' 동양(이라고 하지만 한국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 중앙아시아 또는 인도 지역의) 여성 노예라는 주제가 널리 유행했던 것도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이들이 재구성한 동양의 이미지는 위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나른하고 무기력하고 한편으로 신비하며, (성적인) 착취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 노예의 모습 말이다.

 
제롬 (Gérôme, Jean-Léon, 1824~1904), 노예시장, 1866

제롬의 '노예시장'에서 표현된 여성의 모습은 보다 적나라하다. 아름다운 나체의 여인은 벌거벗기워진 채 입을 벌려 남성의 손가락을 받아들인다. 말이나 소를 구입할 때와 같은 이유로 구매자에게는 노예의 치아를 확인할 권리가 있으며, 구매자가 주인이 된다면 노예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실 노예의 모든 것은 결코 의지대로 행사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노예는 원칙적으로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의 의지조차 없다.

시장에 상품으로 내세워지는, 다른 이에 의해 통제당하는, 다른 사람의 손을 거처 가치를 확인받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소유의 의지도 없는 노예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화면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점이 있다. 벌거벗고 있는 인물은 오직 노예들 뿐이라는 점과 노예는 결코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 속의 노예들은 (물론 그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관찰자에 대해 충분하게 배려하고 있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시선을 돌리고 있는 나체의 여성과 같이 수동적인 동양의 모습을 설정한다.

 
 
쇼팽 (Schopin, Henri-Frédéric, 1804~1880), 노예시장, 1846

오리엔탈리즘의 날조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합리적인 서양이 무지몽매한 동양을 선진계도한다는 이미지를 확보했을 때 어떠한 착취도 정당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순종적인 여성 노예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소비된 까닭은 이런 이미지가 소유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원하는 대상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 뿐이다. 이런 작품에서 구원을 바라는 여성, 구매를 기다리는 여성의 무기력한 이미지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효과를 노리고 설정된 것이 아니다.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은 차라리 반항하는 여성의 이미지일 것이다.) '왜 소유욕의 정당화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타자에 대한 전인적인 소유, 저변에 깔려있는 보편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점은 상대에 대한 대상화이다. 주체는 대상을 격리시키기 위해 상대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단순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 한계는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보다 정교한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 대상의 왜곡과 재정의 작업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성에게, 소유하고 싶은 대상의 목을 베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팜므파탈과 같은 부덕함은 없다는 식의 차이점을 부각시기키 위함이다.)

19세기 화가들에 의해 왜곡되어 재정의된 여성 노예의 이미지는 이런 시도의 결과물이다. 여성 노예들은 저항 없이 남성 주인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남성 주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소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말이다. 이런 시선이 폭력이며 허구라는 사실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진정성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BDSM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충족시킬 수 있는 부분은 진실 보다는 차라리 만족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노예를 소유하는 것, 쾌락을 위해 신뢰에 근거한 주종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노예를 표현한 예술품을 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3

노예를 주제로 한 꼭지를 쓰면서, 성매매 등의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현대판 노예제도에 대해 가열차게 비판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본 칼럼에 어울리는 것은 차라리 노예를 바라보는 시선, 그 폭력적인 욕망을 이해하는 작업일 것이다.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욕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사람을 비열하게 만들지라도, 아름답다. 탐미적 부도덕을 비판한다면 달게 받는 수밖에 없겠지만, 부도덕한 소유욕은 꿀에 절인 외로움과 같이 달콤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다음에는 보다 더 달콤하고 끈적한 소유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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