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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B의 이야기 - 돈은 갚아야지 이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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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나간 후 많은 분들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망우리 사신다는 모양께서 보내주신 친구와의 애틋한 사연, 이번 회에선 그 편지의 전문을 옮겨 드리는걸로 대신하겠습니다.

 
1

이젠 어디에서 뭘하는지 알수 없는 B에게.

안녕 B야. 우리 서로 못만난지 꽤 오래구나. 잘 지내고 있는거니?

요즘 햇빛이 참 곱더라. 이렇게 밝은 봄날 햇볕을 쬐고 있자니 니 생각이 더 자주난다. 너도 나처럼 어딘가에서 햇볕에 눈감고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생각해보면 대학 4년 내내 너랑은 참 징그럽게도 붙어 다녔던거 같아. 너희 어머니가 사기죄로 교도소 가신... 어머 미안, 이런건 너의 프라이버신데... 그냥, 너희 어머니가 멀리 가시는 바람에 넌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었지. 매일 수업 끝나고 네 방에서 같이 담배 피며 뒹굴거렸던게 기억나. 지금 생각해보면 너랑 나의 우정을 키운건 8할이 아랫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2

생각해보면 너는 나의 좋은 친구였지만 동시에 좋은 제자이기도 했던거 같아.

난 너희들보다 애인을 좀 먼저 사귀고 먼저 첫경험을 하게 되면서 회당 오백원씩 받으며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지. 그중에서도 너는 항상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대는 좋은 수업태도를 가지고 있었어. 나와는 달리 4년 내내 애인 사귈 기회가 없었던 넌, 내가 남자의 거기를 언급이라도 할라치면 '어머, 징그러' 하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곤 했던게 떠오르는구나.
 
그러다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넌 선을 보게 되었었어. 연애 경험도 별로 없이 바로 결혼을 준비하게 된거 같아서 좀 안타깝더라. 하지만 막상 선을 보고 온 너는 그 남자와 잘 해보겠다고 선언했었지. 작은 키에 미남이라곤 할수 없는 외모였지만, 직장도 안정적이고 사람도 순하고 착하다고 했어. 물론 집도 꽤 산다고 니가 별로 중요한건 아니라는 척 마지막에 덧붙이던 것도 기억이 난다.

니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 셋이 종종 함께 술마시고 어울리던거 생각 나니? 너는 나를 '베스트 후렌드' 라며 소개했고, 니 애인이 나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해준 덕분에 나도 곧 네 애인과 꽤 친한 사이가 될수 있었어. 근데 내가 얘기 했었나? 너희 둘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풍뎅이 한쌍'이란 단어가 늘 떠오르곤 했다는거...(나 풍뎅이 좋아하는거 알지?)
 
3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니 애인이 나에게 전화해서 따로 만나자고 했어. 난 속으로 당황했지. 왜 날 따로 보자고 그럴까. 혹시 나한테 딴 맘 먹고 있는건 아닐까. 지난번에 입고 나간 블라우스가 넘 가슴이 파였었다는게 떠오르면서 후회가 되더라. 이 사실을 너한테 바로 보고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잔뜩 고민하며 난 니 애인을 만나러 나갔었어.
 
근데 그 호프집에서 니 애인은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며 쓰잘데 없는 얘기만 하드라. 결국 내가 '절 왜 보자고 그러셨어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줘야 했었지. 그제서야 나온 얘기가 뭐였는지 기억 나니? 오래 됐지만 아직도 생생해서 다시 한번 그대로 옮겨볼께.
 
'저... 정말로 B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근데요... 저도 남자잖아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 두고 이렇게두 하구 저렇게두 하고 싶은거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B가 너무 연약하고 여린 애라서... 잘못 건드리면 깨질까봐 조심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제가 계속 참아야 하나요? '

 
기가 막히드라. 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키 170에 75키로인 너를 연약하다고 표현해서 기가 막혔던건 아니야. 예전 내 애인도 내 가슴이 지구에서 제일 크다고 그랬었는데 뭐, 사실 그런게 또 사랑이잖니. 내가 황당했던건 왜 그런걸 나한테 얘기하냐는 거였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별 대답을 못해준 나는 이 얘기를 너한테 그대로 전했었다. 그러자 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한테 이렇게 얘기했어.

'강하게 밀어붙이라고 코치해줘.'
 
이 풍뎅이 커플이 날 갖고 무슨 짓을 하는거지?? 잠깐 분노할뻔 했었어. 하지만 그래, 넌 나의 베스트 후렌드니까. 단지 너무 순진한 커플이니까 벌어지는 주접... 어머, 이런 험한 말이 나도 모르게 그만... 그냥 주책이라고 나는 아량을 갖고 이해했어. 그래서 너희 둘의 '사랑의 무전기' 역할을 기꺼이 해주기로 마음 먹었지.
 
“여기 만져도 되냐고 물어봐 주세요.” “거기 말고 약간 아래가 낫다고 전해달라네요.'

걱정과는 달리 이렇게까지 나에게 역할을 맡기지는 않더구나. 여튼 너의 지시를 따른 내 조언이 전해진 후 니들 참 바쁘드라? 맨날 만나구, 전화하면 옆에서 지퍼 닫는 소리도 들리구... 비됴방에서 <양들의 침묵>을 봤다면서 농촌 영화는 역시 취향에 안맞더라는 얘기나 하구. 그래서 니들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추측하며 나도 기뻐했었어.
 
4

그러다 오랜만에 셋이 같이 만나게 되었지. 진도 나가기 바쁘셨을 너희들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길래 난 잠시 긴장했었단다. 역시나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너희는 '첫경험'을 치룰 일정을 드디어 정했다고 나에게 공지해주셨어. 굳이 그런거까지 알려주다니 넘 자상한거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채 해소하기도 전에 너는 바로 이어서 나에게 어퍼컷을 날리더구나.

'동해에 가서 하려고 하는데, 니가 같이 가줘야겠어.'
 
갑자기 목이 탄 내가 맥주 이천을 한숨에 들이켰던 거 기억 나니?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니들 미친거 아냐??' 하고 절규하려 할때 눈치 빠른 니가 얼른 나를 달래려 들었지. 너는 첨이라서 너무너무 떨린다며, '베스트 후렌드'인 내가 옆에 있어줘야 안심할 수 있다고 했어.

'니가 같이 안가주면 나...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못할거 같애...'
 
고개를 45도 각도로 내리깔고 니가 저렇게 얘기할 때, 니 애인은 그런 니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침 흘리며 웃음 짓더구나. 물론 그래서 내가 그때 오바이트를 했던건 아냐. 이 상황이 던져준 충격에 속이 울렁거렸던 것뿐인데 하필...
 
'같이 가시죠. 방은 물론 따로 잡아 드릴꺼구요. 제가 회랑 맛있는것도 많이 사드릴께요.'
 
 
회란 말에 조금 분노가 사그러들긴 하더라. 그리고 너의 설득이 이어졌지.

'우리 집이 엄격한 거 알잖아. 니랑 같이 간다고 허락 안 받으면 엄마가 절대 여행 안보내줄꺼야. 가서도 너 전화 바꿔줘서 믿게 해드려야지.'

너희 어머니 출소... 아니 멀리서 돌아오셨다는 거 그때서야 알았어. 멀리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엄해진건가 의아했지만... 니들이 막 멕인 술기운도 돌고, 회란 말에 솔깃도 하고, 들어보니 그럴듯도 하고... 그래서 난 결국 허락해버렸지.
 
5

드디어 우리는 셋이 함께 동해로 떠났어. 체크인하고 짐을 놓으러 방에 들어섰는데...니는 그냥 니 애인 방으로 휙 들어가더니 문을 잠궈버리드라? 난 그래도 해나 떨어지면 그럴줄 알았는데 좀 당황스럽더구나. 그때 니들한테 방문 두들기며 이렇게 물었던거 기억나니?
 
'이렇게 뻔뻔한 것들이 왜 굳이 여까지 와서 해야해?'

대꾸 없길래 니들 그러는 동안 나 옆방에서 티비 봤다. 텔레토비 하드라...

보라돌이가 라라를 덮치려 할때였나... 얼굴 발그레해진 니가 내 방에 들어오더구나. 그러더니 이것저것 보고를 하기 시작했지. 너무 아팠다는 둥 남자꺼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는 둥... 근데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져서 말했지. 막상 했는데 니가 출혈이 없었다며, 혹시 니 애인이 의심이라도 하는거 아니냐는 걱정을 아주 길게 한숨쉬며 늘어놓았었어. 난 인생의 선배다운 의젓한 태도로, 여자는 첫경험이더라도 출혈이 없을 수 있다고, 니 애인이 그런 거 의심하면 못난 놈이라고 다독여줬어. 그리고 혹시라도 니 애인이 그런거 잘 모르는 사람이면 내가 잘 설명해주겠다고 안심시켜줬지. 그제서야 넌 그 큰 얼굴을 환히 펴더구나.
 
그러고 우린 같이 회를 먹으러 갔어. 그때 내가 자꾸 2차 가자며 주책 없이 굴었던 거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해. 물론 니들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쌩까고 후딱 방으로 들어가버렸지만. 나 그날 혼자 방에서 깡소주 까며 밤새웠다. 옆에서 니들 그러고 있을 거 생각하니 나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허벅지가 허전해지는게 영 잠이 안오드라구. 썅...

어쨌든 그렇게 돌아온 후 몇달 뒤에 너희는 드디어 결혼을 했어. 그리고 알콩달콩 잘 살아가는거 같았지.
 
6

니가 결혼할때쯤, 나도 집에서 독립을 하게 됐고 후배랑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됐다. 근데 얘가 니 동아리 후배였던 남자애랑 연애를 하더라구. 나도 몇번 얼굴을 본 사이라 금방 친해졌지. 근데 같이 술 마시던 어느 날이었는데, 룸메이트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그 남자애가 니 안부를 묻더라? 결혼했다고 알려주니 갑자기 막 완샷을 하는거야. 짝사랑이라도 한건가 눈치 보고 있으니깐 나중에 완전히 맛가서는 너랑의 얘기를 털어놓더구나.

너랑 걔랑 숱하게 잔 사이란걸 그때 들었어.
 
그러고보니 너의 자취방에 유난히 자주 와 있던 그 애가 생각나더라. 내가 가면 왠지 허둥지둥하면서 급히 나가 버리던 그 후배. 넌 걔가 단지 후배라며, 귀엽지 않냐고만 했었지. 그래서 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게 우리 대학교 다닐때 일들이었지.
 
그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난 사실 그 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수가 없었어.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혼돈스럽게 꼬여버리는거 아니니? 내가 그렇게 머리 복잡해하고 있는데, 그 애는 너와 걔가 헤어진 이유까지 말해주더구나. 어느날 후배가 니 방에 갔을때 넌 또 딴 남자와 자고 있는걸 걔한테 들켰다며? 그 얘기까지 듣고는 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더 이상 물을수가 없었다.
 
나, 뒤통수 맞은 기분에 잠깐 얼떨떨하더라. 그래도 무슨 오해나 착각이 중간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때 문득 너의 얼마전 담배 얘기가 생각 나더구나.
 
7

넌 대학 1학년때부터 담배를 피어 왔지. 근데 너의 남편은 연애중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어. 그리고는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는 하루에 반갑씩 펴대고 있는데, 남편은 니가 담배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줄 알고 있다는 그런 얘기.
 
그때 난, 남편과 싸워서라도 설득시키던가, 굳이 그런 걸로 싸우고 싶지 않다면 그냥 끊어버리던가 하면 될것을 그렇게 숨기고 있는 니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남편이 보수적이더라도 어차피 휘어잡고 살고있는 너인데, 속이면서 피느니 그냥 말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내가 권하자 넌 하얀 담배 연기 내뿜으며 이렇게 대답했어.
 
“꼬투리 잡힐 꺼리랑은 아예 던져주지도 않는게 좋아.”

재밌다는듯 웃으며 저 얘기 하는 널 바라보며, 널 만난 후 처음으로 니가 무서운 애라고 느꼈던거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이 떠오르자 그제서야 이 후배의 말이 전부 진실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
 
하지만 이왕 다 지나간 일. 원래 여자들이란 친구에게도 자신의 첫경험 얘기를 숨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는거 알아. 니가 그런 경향이 좀 심한 애였다고, 그러니 굳이 깊게 생각할 가치 없는 일이라고 그동안 생각했다. 나보다도 먼저 경험이 있던 너에게 내가 선배랍시고 이런저런 조언해줬던거 생각하면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걸로 우리 우정이 훼손될 이유는 없다고 애써 믿었어. 그리고 난 이 일을 혼자만의 비밀로 묻어놓고 너를 계속 만났었다.
 
근데 어느날 넌 너희 엄마와 함께 나를 찾아왔지. 어딘가에 투자를 하게 됐는데 돈이 조금 모자른다며, 그걸 못 메꿔넣으면 전재산이 날아간다며 울상 짓더구나. 그리고는 석달안에 아주 많은 수익금과 함께 돌려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래서 난 직장을 관두고 받은 퇴직금과 집을 옮기면서 받은 전세금을 합쳐서,

내 총재산이었던 2천만원을 너에게 송두리째 빌려줬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뒤 지금까지 넌 연락을 끊고 어딘가로 잠적해 버렸다.
 
 
9

아, 나의 ‘베스트 후렌드’ B 야, 내가 옛날 얘기를 너무 길게 해서 혹시 짜증 나진 않았을지 걱정 되는구나. 니가 나에게 진실을 얘기 하지 않은 거, 나를 이용해서 니 남편의 신뢰를 획득하는 치밀한 드라마를 연출한 거,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다 충분히 그럴수 있는 일이지 뭐야.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건데 내가 왠 엄살을 그리 부렸는지...
 
나, 물론 니 남편한테는 평생 비밀을 지킬거구, 니가 담배 피는 것도 절대 고자질 하는 일 없을꺼야.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말하고 자시고 할거나 있겠니 그치? 남자놈들한테 있는대로 다 얘기 했다가 나중에 뒤통수 맞는 나에 비하면 너는 얼마나 현명한 앤지... 이젠 니가 자랑스러워. 진짜다 믿어주라. 나 이렇게 모든걸 전부 잊고 다 이해하고 있으니깐 넌 내 앞에 다시 나타나주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러니 제발 전화 그만 피하고 피같은 내 돈만 좀 갚아주렴. 단돈 오백만원이라도...

나 지금 집세도 못내고 컵라면 먹으면서 이 편지 쓰고 있어..
 
이년아...
이 글 보면 꼭 연락 줄거지? 
아, 니가 너무 보고 싶다 친구야.......................
 
눈부신 봄햇살을 맞으며,
망우리 단칸 사글세방에서. 너의 베스트 후렌드가 띄운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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