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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into bloom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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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싸래한 우디향. 약간 멀찌기서 맡은 그의 향은 ‘향’이었다. 조급하지 않고 찬찬한, 스멀스멀 몸을 에워싼 향내. 엑스맨은 자못 마른 몸을 가졌다. 쌍꺼풀 없는 기름한 인상인데 눈이 쏙 들어가있는 게 퇴폐미까지 더해져있었다. 느린 듯 여유로운 몸짓과 가느다란 선이 더없이 섹시하게 느껴져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왼다리 위에 오른다리를 얹어 꼬고 앉은 그는 그 뇌쇄적인 눈빛으로 날 훑었다.

“그래서, 어때요?”

그래서 어떻냐니, 당최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우린 이제 만난 지 5분 남짓했고, 이전에 오고갔던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어떻냐는 건가. 이 곳의 분위기를 묻는 건가. 얼굴에 띄운 물음표를 캐치해낸 그는,

“표정을 잘 못 숨기나 보네요. 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고?”

어물쩡 뒷말을 흐리는 엑스맨. 그래, 내가 을이니까. 할 말이 어지간히 없었나, 오는 길까지 걱정해주다니.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판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분들은요? 엑스맨님 혼자만 오는 줄은 몰랐어요.”
“오늘은 나랑만 만납니다. 크루와 수강생은 모델이 어떤 사람인지 심층적으로 분석한 후에 만날 거예요.”

크루와 수강생이라는 말에 갑자기 심장이 반응했다. 쓰나미와도 같은 대단한 것들이 일순간에 몰려왔다. 얼굴에도 피가 몰리는 듯 했다. 빨개졌겠지. 아니, 빨개지지 않더라도 엑스맨은 분명 알아차렸을 테지만.

“슬슬 이동해 볼까요? 사람들 많은 곳은 싫어서.”

개괄적인 소개를 마치고 나니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 찰나의 정적마저도 엑스맨은 싫었나 보다. 어차피 나의 인적사항이야 메일로 잔뜩 적어두었고, 엑스맨은 워낙에 숨기고 가리는 게 많은 사람이다. 무릎 위에 깍지낀 손을 풀더니 이내 차르르 손목시계가 소리를 내며 엑스맨이 일어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찬란한 나무향이 그윽했다. 후각이 예민한 나로선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선 그 때, 숨을 조금 깊게 들이쉬었다.

“세상에 관심이 많군요. 다방면으로.”
“네? 아... 네, 그냥 뭐 이런저런...”
“훌륭하네요.”

당최 엑스맨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만나자마자 어떠냐고 묻더니, 그깟 심호흡 한 번 했다고 훌륭하다 한다. 알쏭달쏭한 사람인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뭇 그가 무서워지고 있었다. 또박거리는 보폭이 점점 좁혀져, 나는 이내 종종걸음으로 걷게 되었다. 불안함을 느끼는 일종의 신호였으리라.

엑스맨이 슈퍼카를 몬다는 뜬소문은 결국 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그의 차는 광이 살짝 무딘 제네시스의 쿠페였다. 연식이 조금 된 듯해 보였다. 엑스맨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안전벨트의 클립을 채우고 나니 비로소 그의 향을 더욱 깊게 들이마실 수 있었다.
중후하다고 표현하자니 무겁지 않았고, 클래식한 것 같으면서도 트렌디했다. 백단향을 통째로 차에 실은 듯, 은은하면서 알싸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긴장되면, 글로브박스를 열어봐요. 거기에 있는 거 마셔요.”

엑스맨은 확실히 명령형의 말투를 썼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행선지도 알리지 않은 채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어떤 약국의 얄따란 비닐봉투 안에는 노오란 빛의 일반 드링크제가 있었다. 따로 개봉한 흔적이 있는지 티나지 않게 살핀 후 그가 명령한대로 나는 그 드링크제를 마셨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노란 액체는 찰랑찰랑하며 인중에 잠시 닿았다가 이내 식도로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얕은 트림이 나왔지만 주행중인 차 안에서는 아무리 귀가 밝다 한들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당신이 모델로서 적합한지 시험을 하러 가는 길이에요. 뭐, 이미 시작된 시험일 수도 있겠네요.”

시험이라... 반대였을 당시에 나는 시험을 했던가.
수 년 전, 입시시험이 한창일 때, 누드크로키 모델이 필요했다. 학원에서는 줄리앙이나 아그리파를 주로 그리거나 친구들끼리 돌아가며 서로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지루해진 우리 중 누군가 누드크로키를 그리자고 입을 뗐는데, 도무지 구성원 중 누군가가 지원할 분위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이후의 민망함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SNS를 이용하여 누드크로키 모델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략 원하는 신체스펙을 적고 잠들면 꼭 서너 명에게서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시험을 하진 않았다. 그저 다양한 사람과 포즈를 그림으로써 담아내길 원했기 때문에 따져볼래야 따질 만한 것들이 없었다. 포징을 잘 못하는 사람이면 다음에 부르지 않았고, 홀드가 잘 되거나 표현이 좋은 모델에게는 밥을 먹여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 크로키북이 다용도실 어딘가에 처박혀있을 생각에 참담한 심정이 몰려왔다. 먼지와 함께 나뒹굴 내 알루미늄 이젤이나 어렵사리 구한 다비드 흉상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샘솟는다. 내가 이러려고 그림을 그린 건 아닌데 말이다. 참, 물감. 물감 사야하는데.

어릴 적을 회상하다보니 차가 멈춰있는 걸 자각했다. 밖은 금세 어두워져 있었고, 엑스맨은 뒷좌석에 손을 뻗어 무언갈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체취와 뒤섞인 향은 약간 고릿했다. 액취가 한 겹 덧입혀진 향수가 익히 그렇듯.
그는 나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검정색의 튼튼한 종이재질에, 앉아있는 내 허벅지를 가리기 충분한 크기였다.

“올라가서 준비해요. 나도 금방 올라갈게요.”

뭘 준비해야 하고 어딜 어떻게 올라가란 건지. 엑스맨은 가보면 알게 된다고 했다. 불현듯 내가 마신 드링크제와 며칠 전 보았던 기사의 헤드라인이 겹쳐 지나갔다. 하기사, 지금까지 정신이 말짱한 걸 보면 이상한 약물을 타진 않았겠지. 이미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을 넘게 달렸는데 뭘 탔다면 진작 난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소주는 냄새만 맡아도 취했으니. 아무튼 엑스맨이 안겨준 쇼핑백을 손에 쥐고 건물로 들어섰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찬란한 샹들리에를 기대했지만, 수천만원대를 호가하는 그런 으리으리한 샹들리에는 없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도로 꾸며진 유리조명 몇 개와, 마찬가지로 딱딱해 보이지도 푹신해 보이지도 않는 카우치가 넓게 자리해 있었다. 프론트에서 내 짐을 들어주러 마중을 나오지도 않았으며, 그저 사무적인 눈인사와 함께 1012호실의 열쇠를 쥐어줄 뿐이었다. 하긴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람. 난 단지 교보재로서 지원을 한 거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사치겠지.

공고문을 본 건 두어 달쯤 전 어느 초여름, 매미소리가 아직 없던 날이었다. 섹스 테크닉 시연 및 강연의 교보재로의ㅡ적혀있기를 ‘모델’이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모델보단 교보재가 더 적합한 단어이지 싶다ㅡ지원자를 구한다는 글이었다. 더구나 엑스맨이 직접 글을 올린 건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다. 말로만 듣던, 글로만 읽었던 그의 직접적인 관여라니... 나의 동경 대상인 그 분의 실물을 영접할 수만 있다면, 사실 엄청난 페이 역시 내 맘을 흔들기 충분했다. 무급노동 내지는 자원봉사였어도 나는 지원했겠지, 암.

생각보다 요동이 덜한 내 심장과 마찬가지로 엑스맨의 행태는 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의미가 뭉그러진 말들과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사뭇 다른 모습.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던가, 나의 커다란 기대에 실망이 점점 섞이고 있었다. 더불어 이 쇼핑백. 하다못해 향초라도 있을 줄 알았다. 스타킹이라든지 코스튬 복장이나. 대체 스틸제 국자와 줄이 달린 스펀지 귀마개가 웬말인가? 이곳에서 청국장이라도 끓이겠다는 건가. 주황색 귀마개 옆, 스틸국자에 빛이 반사되어 얼굴을 찡그렸다. 벙쪄서 말은 커녕 한숨도 쉬지 못 하고 있는 내 뒤로 문이 열렸다. 엑스맨이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뭐 해요, 안 벗고.”

문도 채 닫지 않은 그가 내게 한 첫 마디였다. 그의 손에 역시 같은 크기의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그것도 양 손에.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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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9-07-12 15: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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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9-06-24 10:44:19
와우~ 흥미로운데 기대됩니다 ㅎㅎㅎ
익명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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