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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 활짝 피던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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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이어트는 평생의 과제라 하지 않던가. 심미적인 이유를 배제하더라도 운동의 중요성,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내 경우에는 낯설음에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기도 하고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뿌듯함에 기인한 근자감 마저도 생기곤 한다. 잡생각을 떨치기에도 좋고. 그러니까, 건강해지는 기분이 나는 좋다.

요즘은 조깅을 한다. 요즘이라기에는 꽤 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매일 같은 곳을 걷고 뛰는데도 보이는 것이 날마다 다르다. 해질녘에 걷다보면 반짝거리는 호수와 그 주변을 무리지어 맴도는 날벌레들이 보이고, 이른 아침에 뛰면 가끔 부연 안개도. 봄날에는 왕벚나무 이파리가 하늘거리는 것이 괜히 초연해지더라. 한여름, 더위를 먹어 잠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던 날엔 이러다 쓰러지겠구나- 했는데 나는 생각보다 튼튼하여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오밤중까지 이어지는 더위가 무척 싫어 그것을 핑계삼아 며칠동안 조깅을 걸렀다. 금세 무기력해지는 나 스스로가 미련하기도 했고, 다시 큰맘(?)먹고 뛰고왔더니 팔팔해진 내가 대견했다.


땅에 떨어진 버찌열매가 짓이겨져 공원 산책로를 검게 물들이고, 이윽고 그 검은 자욱이 모두 사라질 무렵에 만난 사내가 한 명 있었다.

무선이어폰은 참 편리하다. 그래서 애용한다. 홀로 외출할 때엔 거의 빼먹지 않는 편이다. 내가 유일하게 꼽는 단점은 잘 빠진다는 것. 물론 평소에 잘 빠진다면 이토록 애용할 수 없을 것이다.
땀샘인지 기름샘인지는 몰라도 귓구멍 안에도 어떤 샘이 있더라.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보면 오른쪽 이어폰만 꼭 슬그머니 미끄러진다. 그래서 오른 귀를 꼭 붙잡고 뛴다. 누가 보면 아마 경호원 흉내를 내는 건가 싶을 것도 같다.
그 날은 귀를 붙드는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

“앗시ㅂ!!”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폰은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나갔고 멈춰야 할 발은 급기야 이어폰을 걷어차버렸다. 호수에 빠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사내의 발에 또 한번 내 이어폰은 걷어차였다. 불쌍한 내 콩나물...
그는 멈춰서서 내 이어폰을 주워주었다. 머쓱해진 나는 마치 속사포 래퍼처럼

“엇 고맙습니다.”

하고 거의 낚아채다시피 그의 손에서 내 콩나물을 회수했다. 민망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 귀에서 빠지자마자 두 번 연속 인간의 발에 걷어차인 무선이어폰이 가엾어서였을까. 아니면 만들어지다 만 욕설을 그가 들었을까봐? 음. 아마 그의 목소리와 생김새 때문이었을 걸. 키 크고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남자가 땀이 송글하게 맺힌 상기된 얼굴에 머쓱한 표정으로 ‘여기요’ 하며 이어폰을 주워주다니... 창피했다.
다행히 처음 본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행인1’이라면 디폴트가 초면 아니냐고? 물론 맞다. 나는 시력이 무척 안 좋은 탓(+안경이나 렌즈도 성가셔 하는 탓)에 행인의 생김새를 거의(어쩌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내의 외모는 기억을 못 할래야 못 할 수 없는 외모였다. 한 마디로 존잘.
매일 가는 공원에서 처음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도 마주칠 확률이 저조하다는 의미로 나는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그 잘생긴 얼굴과 나긋한 목소리는 또 듣고 싶고 또 보고 싶음에 반문할 여지가 전혀 없지만, 스스로 창피한 행동을 했기에 그 수치감을 나는 반복해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라고 생각하며 정신 없이 뜀박질을 하는데, 그와 두 번째 마주쳤다. 그와 나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뛰(걷)고 있었는데, 이어폰을 떨군 자리에서 반 바퀴도 채 뛰기 전에 그를 다시 마주쳤다. 민망해서 그의 얼굴은 못 쳐다봤고, 멀리서부터 그가 뛰어옴을 인지하자마자 애꿎은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뛰었다. 바쁜 척... 휴대폰으로 뭐 할 게 있는 척... 반 바퀴도 안 돼서 마주치다니, 빠르긴 엄청 빠르게 뛰는구나. 그에 대한 두 번째 감상이었다.
그렇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는 우리는 그 날 총 5번을 마주쳤다. 마지막 마주침 이후로 나는 두 바퀴를 더 뛰었다. 묘하게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렇게 사소한 일에 승부욕을 느끼는 내가 꼬마처럼 느껴져서 홀로 풋- 하고 웃어버렸다. 이어폰을 다시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다음날은 전날보다 3시간 늦게 나갔다. 설마 있겠어? 하는 마음 반,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 반. 혹시 마주칠까, 섬유탈취제도 뿌리고 나왔단 말이야.
그러나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쉬우면서도 다행이었다. 시원섭섭이라는 단어가 이런 상황에도 어울릴까.
메신저를 통해 페이스를 관리해주는 사람에게 그 날의 기록을 전송하며 이런 일이 있었다 푸념했더니 답장은 ‘ㅇㅇ, 굿, 내일도 ㄱ’이었다. 못됐어 증말...
하여간 나는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그를 마주치지는 않았다. 처음엔 다행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운한 마음이 커졌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리라.
서운한 마음은 점점 커지다가 뻥- 터져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조깅을 가도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도 못 걸 거면서 왜 그리도 보고 싶어했는지 나도 참 등신 같구나.


어느 주말이었다. 토요일. 05시만 지나도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던 날. 더위 때문이었는지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어, 차라리 뛰고 와서 씻고 상쾌하게 잠이나 퍼질러 자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호수는 너무 잔잔하여 마치 거울이나 빙판과도 같았고, 여느 주말 아침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나처럼 열대야를 못 이기고 나와버린 사람들이겠지.
시리게 파랗던 하늘이 점점 붉어지다가 부분적으로 분홍색, 보라색, 주황색으로 점철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예뻐서 걷다 말고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쳐다봤던 것 같다. 그러다 냉큼 정신이 들어서 휴대폰 카메라를 켰는데 왜 늘 실물은 사진에 담을 수가 없는지. 진심으로 통탄해하며 다시 나는 슬슬 속도를 올렸다. 하늘은 너무도 빠르게 변했다. 어느새 내 발 끝에 기다란 그림자도 생기고. 한 바퀴 걸을 때마다 그림자는 점점 짧아지고. 그리고 점점 더워졌다.
한 바퀴만 더 돌고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찍은 사진들을 전송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에 그가 바로 5m 앞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헉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어!!!’했다. 내적 반가움과 내적 민망함이 한 데 충돌하여 빅뱅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피가 얼굴로 와락 몰리는 느낌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 엄청 빨개졌을 것이다. 마치 고구마처럼. 다행히(?) 서로 눈으로만 아는 체를 하고 금세 뒤로 사라져버렸다. 찰나의 순간동안 만감이 교차교차교차.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도 뒤를 돌아볼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돌릴 수는 없겠더라.

엄청 더웠다. 실제로 기온이 높기도 했는데, 체감온도는 그것보다 한 10도는 훨씬 높은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아주 잠깐만 숨을 고를까 하다가 그냥 설렁설렁 걷기로 했다. 속도를 늦추는 순간, 다리로 삽시간에 피로가 몰렸다. 아까 얼굴에 몰렸던 피가 다리로 모두 채워지는 기분이랄까. 다리가 발기하는 것만 같았다. ‘집에 가면 오늘은 스트레칭을 좀 빡세게 해야겠다’, ‘점심 뭐 먹지’, ‘아 왜 하필 오늘 마주쳤지 나 오늘 존못인데(사실 항상)’, ‘덥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금세 마지막 바퀴를 완주했다.
귀가하기 위해서 공원 출구를 향하는데 흰색 트랙재킷을 입은 남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은 처음 봤는데 왠지 그일 것 같은 생각에 다시 얼굴로 피가 몰렸다.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가 주춤, 뒤를 돌아봐서 그 고민은 흩어져버렸다.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마치 친구를 등 뒤에서 놀래주려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
“어......”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어폰 요즘은 안 떨어뜨려요?”

너무 자연스럽게 내가 가는 방향과 같길래 동네주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점. 이어폰의 안부. 동트는 하늘이 예쁘더라는 너스레. 잘 놀라시나 봐요- 하는 꽤 심한 사투리. 나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조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비가 오는 날에도 조깅을 한다는 얘기. 전역하고 복학도 취직도 안 해서 집에서 야단이라는 얘기.
짧은 길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꽤 많은 것을 알게됐다.

“근데 댁이 어디세요?”
나는 5분만 더 걸으면 바로 집인데, 자꾸 가는 길이 겹치는 것이 의아하기도 불편하기도 하여 물었다.

“저는 ㅇㅇ동이요.”

음. 조금 불편했다. 아니, 조금 많이.
우리 동네에서 꽤 떨어진 동네였다. 내 설레발이었을까, 아니면 데자뷔 같은 거였을까. 이상한 위화감을 지우지 못한 채 나는 잠시 벙쪄있었던 것 같다.

“내일은 언제 나오시게요?”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답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아님 거짓말을 해야할지 그 짧은 시간에도 나는 눈을 요리조리 굴렸다.

“아, 저는 내일 저녁먹고 나갈라고요.”

궁리하던 눈알을 들킨 걸까, 그는 자문자답하더라. 아, 네.

그와 나는 내일 봬요- 같은 형식적 인사 조차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번호를 묻지도 않았다.
내가 괜한 김칫국을 마시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은 많지만 그가 맡은 배역이 악역이 아니기를, 적어도 내 주변엔 나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곱씹고 나는 귀가를 마쳤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http://redholic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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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9-08-23 23:13:17
어쩜 요리 글을 맛깔스럽게 쓸까
익명 / 아 제일 좋다
익명 / 촘촘한 얼개 구상하시고/ 상큼한 어휘 사용하시고/ 도전적인 표현 구사하시어/ 새로운 종류의 인터넷 섹스소설 장르 개발해 보시지요/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익명 2019-08-23 20:20:21
흠...짧은 반바지를 준비하시면 되겠습니다
익명 / 전 레깅스가 더 좋습네다
익명 / 레깅스라함은 전체적으로 자신있단 얘기로...
익명 2019-08-23 19:59:34
운동으로 흘린땀에 점철된채 온몸이 농후하게 섞이는 섹스 예아!!
익명 / 지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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