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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 활짝 피던 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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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눈이 꽤 일찍 떠졌다. 꿈에서 그가 나온 것도 같은데, 아닌 것도 같고. 깨고 나니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꿈이었다. 뭐였지, 뭐였지. 이러다가 또 문득문득 생각나겠지. 아- 뭐였더라.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나는 짜증이 났다. 그러다가도 내가 그럼 그렇지. 아--
전 날의 긴장 때문이었는지 스트레칭이 소홀했던 탓인지 다리가 조금 땡땡해진 기분을 느끼며 이른 아침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스피커에는 Apollo XXI 앨범 전곡을 재생시켜두고. 청소기 소음, 우다다거리는 고양이. 먼지를 털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더니 금세 더워졌다. 아침인데도 덥다니. 싫다. 두 손으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쓰레기봉투가 나왔다. 두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또 있을까.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할지, 샤워 후에 밥을 먹을지 고민했다. 인생은 고민의 연속이라던가. 담배를 피우며 생각하자고 나섰는데, 재떨이를 비우지 못한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음. 이건 나중에.
결국 밥도, 샤워도 미뤄둔 채로 다시 잠에 빠졌다.

어떤 가방 안에 향수가 잔뜩 있었다. 미니어처로만. 랑방부터 톰포드까지. 성별에 관계 없이. 계열에 관계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007가방 같은 거였는데, 그 안에 미니어처 바틀들이 각을 잡고 정돈되어 있었다. 끌로에 사의 향수를 집어 시향해보려는 찰나, 꿈에서 깼다. 깨고 나니 점심 때가 한참 지나있었다.
평소, 때에 맞춰 끼니를 해결하는 편이 아니라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으나 그 날따라 걱정이 조금 됐다. 지금 밥을 먹는다면 저녁 역시 늦게 먹을 테고, 그럼 조깅도 늦어질 텐데. 그러다가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지?

떡볶이를 먹었다. 청양고춧가루였는데, 한 번에 확 쏟아져서 악-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많이 매워서 우유를 막 들이켰더니 포만감이 금방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꿈이 생각나서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침대맡에 등을 기대 앉았다.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한다는 것. 책을 가까이 두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 생일에 유달리 책선물을 많이 받아 방 한 켠에 쌓인 것이 조금 신경쓰였나보다. 시집도, 작품(그림)집도, 에세이도, 만화로 된 고전도. 전부 눈에 안 들어왔다. 눈에 들어올 법하면 그가 전 날 했던 얘기가 떠올라서 상념에 잠겼다. 요가를 해야 하나...


시간은, 참 덧없이도 흐른다. 벌써 7시가 넘었다. 뭔가 가슴 속이 꾸물꾸물했다. 맥박이 간헐적으로 쿵. 그리고 쿵쿵. 속이 니글거렸다.
에잇,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안 만나도 조깅은 해야 할 일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쥐가 잘 나지 않는 타입인데, 공원에 다다르기도 전에 종아리가 뻑적지근했다. 공원에 도착해서 막 두리번거렸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종아리가 슬며시 풀어지는 것 같았다.
걷고 뛰는 자세에 엄청 신경을 쓰면서 공원을 돌았다.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 거위에게 뻥튀기를 던져주는 아저씨도 보고, 돗자리 깔고 치맥하는 커플도. ‘뭄무-‘ 하면서 산책하는 강아지를 삿대질하며 따라가는 아장아장 돌박이도.
해가 길어져서인지 확실히 사람이 많았다. 뛸라 치면 앞에 무리지어 걷는 사람들 때문에 속도가 나지를 않았다. 무슨 눈치싸움도 아니고. 사람이 없을 때에나 살금살금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스스로 웃겼다.

어느 새 해가 뉘엿거리며 졌고, 이번 바퀴 돌 때에도 없으면 집에 가야지. 하는 심정이었다. 근처에 크로스핏 박스가 있는데, 단체로 나와 공원을 뛰는 무리가 보였다. 혹시 그가 있을까 나는 곁눈질. 역시 없다. 나도 암밴드나 살까.
조금 빠르게 뛰었더니 숨이 엄청 찼다. 숨을 고르려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보니 벌써 한 바퀴를 다 돌았더라. 오늘은 허탕(?)이군. 집으로 가는 그 길에 또 그가 있었다. 젖은 기색 없이 뽀송뽀송했다.

“오늘은 안 뛰셨어요?”
“아, 잠깐 잠들었는데 깨고 보니까 해가 져있길래요.”
“그렇구나.”
“그쪽은 저녁 드시고 바로 나온 거예요?”
“음. 저녁은 아니고 점녁? 점심을 좀 늦게 먹었어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그쪽이라고 하니까 좀 그렇네.”
“ㅇㅇㅇ요.”
“와 이름 엄청 예쁘네요. 누가 지어준 거예요?”
“엄마요. 저도 제 이름 좋아요.”

살가웠다. 막 살가웠다. 그의 과장 섞인 리액션이 불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이름을 물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 근데 이름 언제 물어보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그가 하는 말 몇 마디를 흘려버렸다.

“안 이상해요?”
“네?”
“무슨 생각해요. 내 말 안 들었죠?”
“어... 이름 언제 물어보지- 이 생각하느라... 미안해요. 뭐라그랬어요?”
“아, 그러네. ㅇㅇㅇ이에요. 되게 남자답죠?”
“음... 네.”
“‘음’이 습관인가보네요.”

그는 나를 마주치지 않았던 사이에 머리를 잘랐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안 이상해요?’는 자신의 머리를 지칭한 거였더라.
전 날보다 더 실없는 얘기들을 했다. 전 날보다 더 많이. 이사를 온지는 꽤 됐으나 친구가 아직 없다는 내 얘기에 그는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심심하면 부르라는 정말 심심한 이유와 함께.

그 날 밤, 일과를 모두 마치고 그의 메신저 프로필사진들을 주욱 둘러보는데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일말의 동질감을 느꼈다. 나만 아는 아지트 같은 장소였는데, 그도 안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어 근데
몰랐는데 남자친구 있나보네요’
‘아
네’
‘남자친구가 안 싫어해요?’
‘네
라고 하면 웃기겠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럴 수도 있죠
근데 안 싫어할 수도 있나?’
‘음’
‘또 음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어..
정확하게는 불편해 해요
근데 그 불편함보다 존중하는 마음이 더 크대요
방해 안하고 싶다고’
‘와
이런말 해도 되나
개멋있네요
막 남사친이랑 술마시고 그래도?’
‘넴’
‘대박이네’
‘저도 제 남자친구 엄청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ㅎㅎ’
‘나도 본받아야겠네
아니다
저는 못 그럴 거 같네요
ㅋㅋㅋㅋ’

그 뒤로도 실없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졌고, 그에 관한 조금 더 사사로운 것들을 알게 됐다. 나이라든지, 가족관계라든지, 함께 사는 강아지 이름 같은 것들.


정작 나는 조급할 때가 많으면서, 나를 향한 조급함에는 가장 먼저 거부감을 느낀다. 이야말로 내로남불.
선을 넘으면 문이 콱 닫히는 시스템인데, 그는 그 선 앞에서 넘을 듯 말 듯한 태도였다.

확실히 혼자 하는 운동보다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 페이스도 훨씬 좋아졌다며 패이스메이커로부터 살면서 듣기 힘든 칭찬을 들었다. 내 삶은 겉으로 보기에 이전보다 조금 더 윤택해짐을 느꼈는데 이상한 피로함이 그 안에 있었다.
운동친구였던 그가 내 생활 전반에 걸쳐 조금씩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느꼈다.


대부분의 레파토리가 비슷하겠지만,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술 좋아해요?’라든지 ‘여기 가봤어요?’ 하는 물음들. 어느 근육이 아프다고 하면, 예전에는 유투브의 영상을 보내왔는데 요즘은 마사지 실력을 스스로 칭찬했다.

마음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 것. 나는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분명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남자친구는 그저 괜찮다며, 자신이 옆에 있을 테니 후회하더라도 경험으로 삼기를 격려했다.


언젠가 무척 당혹스러운 사건이 생겼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덜덜 떨기 밖에 못 했는데, 그 인과관계의 책임이 나에게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닐 거라는 자책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 사건이 생기고부터 얼마간은 모든 생활을 멈추어야 했다. 과열되어 다운된 저성능컴퓨터처럼. 스스로를 다운시켰다.

그에게서 며칠 연락이 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오지 않았다. 외려 다행이려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요
술 마시러 나오는 거 안 힘들면
나올래요?’

술마실래요? 하는 단편적인 물음이 아니었다. 나 심심하니 술친구나 되어주세요- 하는 가벼움이 아니었다. 그 조심스러움에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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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9-08-24 03:01:26
글 참 맛깔나다! 
그림책보듯 풍경과 글을 한장 한장 넘겨보게되는...
누구세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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