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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치마를 왜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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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치마를 왜 입어?”
 
치마가 일곱 벌이 되기까지 이 질문 참 많이 들었다. 분명 이유를 썼던 것 같은데, 묻는 사람이 종종 있다. 일일이 답해주는 건 쉽지 않다. 치마 입는 이유가 뚜렷하게 한 가지가 아니라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고 해도 반복은 짜증을 부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질문의 뉘앙스가 모두 다르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의문에 맞춰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옷 입는 것 갖고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니 이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바지보다 예뻐서.”
 
대답을 아무리 좋은 걸 찾아도 이 이상의 대답을 할 게 없다. 나는 치마가 바지보다 예뻐서 입고 싶은 것이다. 다른 이야기에서 저항이라는 말도 했지만, 저항한다고 굳이 치마 입을 이유는 없다. 그 저항은 저항하기 위한 저항이 아니라 자존감을 위한 저항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존중하기 위한 저항이다. 내 자존감을 위해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면서 그것을 문제 삼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치마 자체가 저항이 아니다.
 
치마가 예뻐서 입는다고 해도 묻는 사람들이 있다. 말이 거기서만 끝나면 나도 그냥 치마 입는 것에서 끝날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치마를 왜 입느냐는 말이 또 나온다. 그 물음은 내 욕망을 인정하지도 않고, 내 욕망에 따른 행동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힘을 가진 게 없고, 누군가의 삶을 방해하지도 않는데, 스파이더맨처럼 책임이 생겨버렸다. 내 욕망과 욕망에 따른 행동밖에 없었는데, 설명하고 싸워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굳이 왜 치마를 입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바지보다 예뻐서 입는다고 해도 물어보면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소리를 하고 싶다. 나는 치마를 여성복으로 생각하고 입는 것이 아니다. 입고 싶은 예쁜 옷이라고 생각하고 입는 것이다. 바지 입으면 왜 바지 입었느냐고 묻지 않듯 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야 떠올리기는 하지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왜 옷 그렇게 입어요?”
 
“게이였어?”
 
대놓고 묻기도 하지만, “치마 왜 입어?”라는 말을 통해 그런 뉘앙스로 묻는 사람도 있다.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서와 착각한 것 같다. 게이는 남성 동성애자일 뿐인데, 게이가 치마를 입을 이유가 있을까? 트랜스젠더라고 다 치마 입는 것도 아니다. 여자라고 다 치마 입던가? 그리고 나는 다른 젠더의 옷이라고 생각하고 입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의 역할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예쁜 옷을 입을 뿐이다.
 
“여자가 되려고?”
 
이런 말 때문에 찾아낸 말이 젠더 비순응, 젠더 블라인드이다. 안 그래도 치마라는 옷을 처음 살 때 한참을 마음고생 했고, 입고 다니기까지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마음고생 했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난 성 역할이나 성에 따른 옷의 구분 자체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다. 당연하다는 말에 한 번도 그냥 수긍해 본 적 없는 내게 이런 말은 금지와 별다를 바 없는 말이라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젠더 비순응 혹은 젠더 블라인드 운동.
 
젠더 블라인드 운동은 젠더 구분을 피하자는 내용이다. 젠더 구분을 피해서 성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사회적으로 성 역할을 구분한다는 것은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신체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만,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 데까지 역할을 나누는 것은 차별이다. 그래서 “여자가 되려고?” 라는 말이 싫다. 단지 예쁜 옷을 입을 뿐이다.
 
“대단하다.”
 
치마 때문에 여기저기서 건드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 아버지하고도 싸우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치마 입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고 인정해주신다. 그것을 보고 함께 응원의 뜻으로 다단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물론 감사한 일이다. 그게 세상 주류의 관점에서 대단하시긴 하다. 하지만 옷을 어떻게 입느냐는 것은 내 권리이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말이 정말 어색하다. 당연한 권리를 인정해 주는 모습을 대단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사회가 아무리 권리를 인정 않는 사회라고 해도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에 감사하거나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내 권리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누가 준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것
 
“예쁘게 입었다.” “어떡해, 귀여워.”
 
이런 말 말고는 별로 원하지 않는다. 내 옷맵시 갖고 칭찬하는 것은 좋다. 다른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내가 들을 의무도 없고, 스트레스만 받는다. 안 어울린다고 하는 것도 괜찮다. 어울리게 다시 코디하면 되니까. 그냥 내 모습일 뿐이다.
 
만약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옷 왜 입어?”
 
“왜 긴 바지 입어?”
 
“왜 상의 입어?”
 
“왜 태어났어?”
 
뉘앙스가 달라질 때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자꾸 그렇게 치마 왜 입느냐고 질문하면 “왜 살아요?”라는 소리 듣는 기분이다. 질문 감당하기 힘들다.
상큼한 김선생
차별과 혐오는 상큼하지 않아요. 상큼하게 살아요.
http://freshteache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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