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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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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나 2▶ http://goo.gl/hPc2qC


영화 <레드카펫>
 
에로비디오 감독들
 
신감 독의 에로비디오 조감독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자 갑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토록 바라던 현장으로 가는 길은 열렸다만 에로비디오 업계로 올인한 후 뒷일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슬슬 졸업은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학창 시절 내내 예술과 인생에 대한 고민에만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결과 남들 다 있다는 그 흔한 토익 점수도 없었고 학점도 2점대 초반이어서 취업은 힘들 것 같았다. 졸업하면 당연히 영화 감독이 되는 건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할 때는 됐건만 감독이 되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한 심정이었다.
 
이런 시나리오대로라면 졸업할 때까지 에로비디오 작업만 하게 될 테고 졸업 후에는 말로만 들어오던 진짜 에로비디오 인(人)이 되는 것인데 이 험난한 세상을 에로비디오 조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헤쳐 나갈 자신이 없었다. 밤새도록 게임을 하면서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신 감독에게 받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다. 그 번호의 주인은 이제 막 제작사를 차려 활동을 시작한 이모 감독이었다. 그 동안 신 감독과 함께 작품을 제작해 왔지만 신 감독이 충무로 연출부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감독이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이 감독님. 신 감독님 소개로 전화드렸습니다."
 
"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출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감독이요?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
 
"처음부터 연출은 힘들고 일단 조감독부터 하시는게 어떠세요? 분위기 파악도 할 겸..."
 
"네. 사실은 저도 그렇게 알고 연락드렸습니다."
 
"일단 사무실로 오세요. 저희 사무실이..."
 
밤 사이 꽤나 많은 고민을 했건만, 다음 날 해가 뜨자 언제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명랑한 기분이 되었다. 드디어 현장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한국형 로망포르노를 현실화 시키기 위한 이런 저런 망상성 계획을 짜면서 보낸 후 이 감독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목동의 한 고층 오피스텔에 자리 잡고 있었고 클릭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충무로에 영화 제작사가 천여 개 정도 있지만 그 중 메이저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영화사는 열 군데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처럼 에로비디오 제작사도 통틀어 5-60여 개 정도가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메이저로 분류될 만한 회사는 유호 프로덕션, 클릭 엔터테인먼트, 씨네프로 정도였던 것 같다. 내가 일하게 된 회사는 메이저 급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디바 필름이란 곳에서 투자를 받아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독립 제작사 스쿨 씨네마였다.
 
"안녕하세요. 이 감독입니다.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이 감독의 첫 인상은 이필립 감독과는 달리, 조금은 냉정해보이는 유능한 청년 사업가 느낌이었다. 예술영화 매니아 출신으로 사무실 책꽂이에는 각종 미학이론 관련 서적들이 꽂혀 있었고 영화 관련 서적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 고다르 관련 서적들이 인상적이었다.
 
일단 근처 상가의 삼겹살 집으로 자리를 옮겨 나의 경력과 장래 포부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시종 일관 로망포르노가 어쩌구 일본 V-cinema가 어쩌구 횡설수설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얘기를 흥미롭게 들은 이 감독은 우리 같이 힘을 모아 한국 에로계에서도 뭔가를 이루어내보자 정도로 대화의 결론을 지었다.
 
이 감독도 나처럼 예전에 에로비디오 대본을 써서 판매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녀는 떠났다. 지중해로...> 시나리오를 판매한 가격의 3분의 1정도의 가격에 시나리오를 판매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잠시 허탈해 했다. 역시 클릭 엔터테인먼트는 메이저 제작사였다. 그날 대화는 에로비디오 업계에도 메이저와 마이너 제작사의 간극이 결코 좁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사무실로 돌아와 감독과 조감독의 관계로,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말까지 놓기로 합의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혹시 간직해둔 시나리오 있으면 얘기 좀 해달라고 해서, 조금 걸리긴 했다만 이필립 감독에게 보냈다가 퇴짜 맞은 '내 애인은 에로스타'의 기획안을 조금 들려주었다. 이 감독은 나의 기획안을 듣고는 "그거 괜찮겠네 이번 작품 그걸로 하고 싶은데?"라면서 시나리오를 보내달라고 했고 나는 이게 왠 떡이냐 싶어 집으로 돌아와 시나리오를 이메일로 쏴주었다.
 
시나리오를 다 읽은 이 감독은 참 좋게 봤다며 다음 작품으로 '내 애인은 에로스타'를 하기로 결정한 후 최종 수정 사항에 대해 이런저런 지시를 내려주었다. 나는 '역시 좋은 기획안은 임자가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하며 열심히 시나리오를 썼는데 며칠 뒤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내 애인은 에로스타' 시나리오를 투자자인 디바 필름 사장님한테 보여줬는데 봉만대 감독의 '디지털 비디오'와 내용이 똑같다며 퇴짜를 놨다는 것이다. 나는 소재가 비슷하긴 하지만 봉 감독의 작품이 작가주의 성향의 작품이라면 나의 시나리오는 <노팅힐>을 패러디한 철저한 대중상업영화라고 항변했지만 물론 씨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원래 준비하고 있던 '성인식(출시 제목은 <2X8 사춘기>)'이라는 제목의, 지방 소도시의 다방에서 일어나는 사춘기 재수생의 이야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다시 다듬는 동안 시간이 비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장민기 감독과 박선욱 감독(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의 단편 영화 <소풍>의 촬영 감독)에게 이메일로 퇴짜맞은 시나리오를 보냈다.
 
며칠 뒤 장민기 감독(뮤직 비디오 스타일의 촬영기법을 업계 최초로 도입, 대표작은 <여자 기숙사> 시리즈)에게 답장이 왔다.
 
'시나리오는 내용도 좋고 완성도도 탁월해 인상 깊게 봤지만 현재 에로비디오 시장은 작가들에게 정상적인 시나리오비를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습니다. 다른 일 찾아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장민기 감독은 이미 비디오 시장의 몰락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냉정하게 시장이 없어질테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장민기 감독의 이메일을 다 읽은 후 또 밤을 새며 고민하다가 이 감독에게 시나리오 다 썼다는 전화를 받고 다음 날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씩씩하게 사무실로 출근했다.
 

영화 <2x8 사춘기이야기>
 
<2X8 사춘기 > 시나리오
  
#12. 다방 안. 낮.
 
Title 영숙을 만나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성진. 카운터에 이모가 들어오는 성진을 못 마땅한 눈으로 째려본다.
 
이모: 학원에서 공부 안하고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
 
성진: 오늘 공부도 안되구 해서 이모 배고프다. 밥 있어?
 
이모: 대충 알아서 챙겨먹구 가.
 
이모 돌아서서, 손님이 있는 테이블로 간다. 성진, 밥을 챙기는 척 하다가 이모의 눈치를 살피다 카운터로 몰래 다가가 거의 엎드린 자세로 몰래 돈을 꺼내려고 한다. 마침 카운터 쪽으로 다가오던 영숙, 성진을 몰라보고 비명을 지른다. 당황하는 표정의 성진.
 
이모, 성진을 나무라고 있다. 영숙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성진.
 
영숙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영숙: 미안해. 난 니가 언니 조카인 줄 모르고... 이름이 뭐니? 난 어제 새로 온 미스 리... 아니 내 이름은 영숙이야.
 
성진 대꾸도 않는다.
 
여 종업원: 화가 많이 났나 보구나.
 
성진, 심통이 난 표정을 하고 있다.
 
영숙: 어떻게 해야 니가 화가 풀리겠니?
 
영숙,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서 영진에게 내민다.
 
영숙: 자 받어. 이거 누나가 사과하는 뜻으로 너에게 주는거야.
 
성진, 영숙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코웃음 치더니 돈을 보고서는 돈을 재빨리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다. 머쓱한 웃음을 짓는 성진. 일어선다.
 
 
# 25. 다방 밖. 낮.
 
영숙 달려와서 성진의 앞을 가로막는다.
 
영숙: 성진아, 너 왜 그래?
 
성진: 왜 그러냐구?
 
영숙: 내가 뭘 어쨌다구?
 
성진: 그걸 왜 내게 물어.. 누나가 더 잘 알 텐데?
 
영숙: 내가 더 잘 알단구? 뭘?
 
성진: 그렇게 시치미 떼면 내가 모를거라 생각했겠지? (화를 버럭내며) 더러워! 더럽다구..
 
영숙: 더럽다구? 내가?
 
성진: (화를 내면서) 그럼 시바... 이 놈 저 놈 아무에게나 다 주는데.. 구럼 깨끗하다고 생각해?
 
영숙: (놀라는 표정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니가 그걸 어떻게? (잠시 침묵하다가) 성진아! 미안해.
 
성진 : 미안하단 말이면 다 되는 거야? 날 갖고 논거야.. 응.. 내가 멍청해보이니까.. 한번도 안 해 본 아다라서 날 따 먹고 싶었던거야.. 응.. 시바 날 좋아한 게 아니라 그냥 한번 장난 쳐본거지? 그렇치? 장난 쳐본거야.. 그렇지?
 
영숙: 성진아.. 아냐.. 그게 아냐!
 
성진: (잠시 침묵하다가) 우리 이모 가게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줘.. 누나 얼굴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말 없이 성진을 쳐다보고 있는 영숙, 성진 돌아서서 뛰어간다.
 
 
# 26. 다방 안. 낮
 
영숙: 언니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떠나게 되서.
 
이모: 그래.. 나도 너무 섭섭하다.. 얘..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어디 가든지 부디 잘 살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성진.
 
 
# 27. 다방 밖. 낮.
 
영숙, 양손에 가방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뒤를 한 번 돌아보는 영숙, 다시 길을 걸어간다.
 
숨어서 영숙의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성진. 성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프리 프로덕션
 
비디오 출시 예정일이 한달 남짓 남아서 제작을 서둘러야 했다. 일단 배우를 캐스팅하고 장소를 헌팅하는 게 급선무였는데 배우는 에로배우 매니저들을 통해 구하면 되고 장소는 발로 뛰어서 섭외해야 한다고 했다.
 
장소 헌팅과 섭외는 충무로 연출부 생활 6개월 동안 수 없이 해 왔던 일이라 자신 있었는데, 문제는 유명한 스타가 나와 극장에 걸리는 영화가 아니라 비디오 대여점에 은밀하게 배급되는 에로비디오라는 사실이다. 이거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 고민은 됐다만, 섭외해야 할 장소가 다방, 비디오방, 모텔 이어서 업종의 특성상 사장님들이 에로비디오 제작에 호의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저예산이었기 때문에 각각의 촬영 장소들은 한 동네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2박 3일 동안 다 찍어야 하는데 여러 장소를 순회 공연할 정도의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본의 느낌이 중소도시였기 때문에 일단 서울에서 가까운 중소도시를 조사한 뒤 무작정 떠났다.
 
그 동네는 에로비디오 촬영에 이상적인 도시였다. 다방이 많았으며 높은 건물도 거의 없고 논과 밭이 있어 적당히 시골스러운 분위기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지나가며 동네 구경을 하다가 제일 먼저 보이는 다방 간판 앞에 차를 주차시켰다.
 
다방이라 하면 왠지 에로틱한 레지들도 많을 것 같고 동네 아저씨들의 사랑방 비슷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우리가 찾아간 다방에는 할머니 한 분과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방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가 '얘들이 여기 왜 왔을까?' 라는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여기 사장님 좀 뵙고 싶은데..."
 
"내가 사장인데?"
 
"아 저는 디바 필름의 이 감독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한 편 찍으려고 하는데 다방이 필요하거든요."
 
"무슨 영화요?"
 
"그냥 조그만 비디오 영화요."
 
"그래요? 근데 우리 다방이 별로 볼품없는데..."
 
"아니요. 저희 영화 분위기에 딱 맞는 걸요. 적당히 품격도 있고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근데 너무 이상한 건 안 찍을 거지?"
 
"그럼요."
 
"얼마 줄 거야?"
 
할머니 사장님은 우리가 어떤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지 대강 눈치 챈 후 바로 가격 협상에 들어갔는데 장소 대여료로 하루 매출의 서너배 정도가 넘는 금액을 부르며 아예 뽕을 뽑으려고 했다. 우리는 적당히 그 반액 정도의 가격에 합의를 본 후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명함 한장을 남기고 다방에서 나왔다. 그런 식으로 비디오 방과 모텔 헌팅은 일사 천리로 진행되었는 데 그 도시의 업소 사장님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에로비디오 제작에 협조적이었다.
 

<2x8 사춘기이야기> 여주인공 박희수
 
장소 헌팅이 끝나고 배우 캐스팅을 시작했다. 길거리 헌팅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서 캐스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전문 매니저를 통해 발굴된 배우 중에서 선택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감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매니저들에게 전화를 한 후 프로필 사진을 이메일을 통해 받은 후 후보 리스트를 작성했다. 여배우 후보로 총 20장 정도의 프로필 사진이 왔는데 그 스무 명이 현재 에로비디오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배우 전부라고 했다. 에로비디오 업계가 그 정도로 영세했다. 몇 명 안 되는 배우들도 오래 활동해 봤자 3~4개월이고 소비자들이 새로운 얼굴을 원하기 때문에 여배우들은 끊임없이 물갈이 된다고 했다.
 
 에로계의 탑스타 하소연과 은빛의 사진이 없었는데 그들은 클릭 엔터테인먼트 전속배우라서 캐스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작성한 여배우 후보 리스트 매니저들 몇명에게 전화해 배우를 직접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한 몇 일 뒤 드디어 여배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혹자는 '연예계 X파일'을 생각하며 여배우와 감독의 은밀한 뒷거래 현장 같은 걸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와의 미팅은 사무실에서 아주 건전하고 사무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연 여배우는 이 감독이 이미 기존에 활동하고 있는 스타급 배우로 결정해 놓았기에 이번 여배우와의 미팅은 조연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신인 여배우 '지나'는 매니저 한 명과 함께 해맑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감독과 매니저가 계약조건에 대해 협의하는 동안 나는 사람 수만큼 커피와 차를 타서 나른 뒤 호기심 어린 시선을 태연하게 가장하며 여배우 지나의 얼굴을 천천히 관찰하였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어디에서고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아담한 체형의 귀염성 있는 아가씨였다. 한마디로 에로배우라고 해서 특별히 에로틱하거나 섹시한 느낌은 전혀 없는 밝고 건전하고 명랑한 인상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 매니저가 갑자기 바디 미팅 얘기를 꺼냈다.
 
"바디 미팅 하셔야죠?"
 
"괜찮아요. 별 이상만 없으면 되죠.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예요. 할 건 해야죠."
 
"아니... 배우가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넘어가셔도 됩니다."
 
"지나가 부끄러워 한다구요? 하하. 부끄럽니?"
 
"안 부끄러워요. 나 할 수 있는데..."
 
바디 미팅이 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가운데 여배우 지나는 갑자기 쇼파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코트와 겉옷을 훌러덩 벗고는 사무실 창가 앞에 서서 홈쇼핑 속옷 모델처럼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조감독! 카메라 가져와."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카메라를 준비해 감독에게 주었고 감독은 지나의 바디를 위 아래로 천천히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며 찍기 시작했다. 바디 미팅이라 함은 에로비디오에 출연해야 할 여배우의 몸에 보기 흉한 상처나 문신의 유무 여부를 확인하는 오디션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랬다. 바디 미팅은 반드시 거쳐야할 중요한 제작 절차였다. 그렇게 남자 배우들과도 미팅을 가졌고 순조롭게 주요 배역들의 캐스팅을 마무리 지었다.
 
문제가 있다면 여주인공의 옛날 애인 역이었는데 비중이 너무 작아 경제적인 이유로 캐스팅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에로배우들은 한 컷을 출연하더라도 하루 일당을 줘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작은 배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시킬 수도 없는 게 베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던 중 인터넷 채팅 싸이트가 떠올랐다. 여배우 캐스팅이면 몰라도 남자 배우라면 어떻게든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채팅 사이트 몇 곳에 동시 접속한 후 대화방을 하나씩 만들었다.
 
'에로 영화에 출연할 남자 배우 모집합니다.'
 
잠시 후 호기심성 쪽지가 무수히 날아오기 시작했는 데 대부분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갔다. 그런 와중에 사진을 보내오는 이가 딱 한 명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에로배우를 하고 싶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훤칠하게 잘 생긴 젊은 아저씨였다.
 
'저 진짜 에로 배우 꼭 하고 싶거든요? 시켜 주실 거죠?'
 
'네. 일단 번호를 주시면 내일 회의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이 감독은 한참 동안을 컴퓨터에 올라온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이미지가 괜찮긴 한 데 처음 하면 좀 어려울 수도 있거든... 그게 좀 걸리네."
 
"왜요?"
 
"베드신이 아무렇게나 막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게 아니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적당히 지켜줘야 하는 게 있거든. 그거 말고도 처음 하면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전문배우 보다는 못하지."
 
그날 저녁 아저씨는 사무실로 찾아왔다.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활달하고 유쾌했으며 말도 시원스럽게 하는 남자답고 건장한 스타일이었다. 저 정도라면 뭘 해도 잘 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감독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만난 자리에서 곧장 캐스팅을 결정지었다.
 
헌팅과 캐스팅을 마무리 짓고 나자 남은 건 제작 스텝을 구하는 일이었다. 감독님이 에로비디오 찍을만한 촬영 감독 아는 사람 없냐고 해서 나와 단편 작업을 같이 했던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가격만 맞으면 촬영 장비 일체와 촬영부까지 구해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가격 조정을 한 후 스텝 꾸리는 것도 마무리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히 '프리 프로덕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문서 작업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서 촬영 일정표와 소품 구분표, 의상 연결표를 작성했다. 문서 작업이야 연출부 시절 워낙에 많이 했던 일이라 엑셀의 'V-LOOK UP'까지 활용해 멋드러지게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모든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마친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나중에 후회하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도서관에 가서 토익 공부를 해야 되는 건 아닌지 등등 잡다한 고민을 했는 데 잠시 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중간에 잠깐 잠에서 깼는데 지하철은 마침 그때 '충무로역'을 지나고 있었다. 게슴츠레 눈을 떠 보니 점점 멀어지는 파란색 3호선 충무로역 간판이 보였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사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저기였는데 지금 나는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로망포르노가 예술이네 어쩌네 해도 극장 개봉 영화의 매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꿈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괜시리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다음 날 아침, 깨자마자 꾸물댈 틈도 없이 비디오 자켓 촬영을 위해 청담동에 위치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나 4▶ http://goo.gl/nDSMO0


글쓴이ㅣ에로영진공 위원 최경진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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