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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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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으로 일러 주기를, 몽유병과 흡사하다고 했다. 잠결에 산책이나 운전을 하는 사람도, 주전부리를 하거나 평소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댔다. 그러니까, 과음 후 필름이 끊겨 있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들 대부분이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경우에는 위에 열거한 경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아, 술에 취해서는 여러 번. 아끼는 사람들을 꽤 오래 꽤 많이 괴롭게 했지.
내 경우에는 소비였다. 옷과 신발과 가방은 물론이요, 그맘때에는 책과 식물을 무더기로 샀다. 도서상품권이 생겨도 어느 책을 살지 영영 고민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결제일 바로 이튿날에 <슬픔의 위안>과 <모든 상실에 대한 치유, 애도>를 비롯한 다섯 권의 책이 택배로 도착했다.
당시에 상실했던 것은 위안이 되던 존재였고 그로 인해 나는 슬펐으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전혀 치유도 위안도 되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나는 그 누구와도 이별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를 애도했던 걸까.
말이 씨가 됐던 걸까 아니면 까마귀가 날아서 배가 떨어진 걸까, 아니면 슬퍼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눈치 챈 걸까.
덕택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나는 버팀목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존재를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는 빠르게 떠나 보내야 했고 갑작스러운 황망함을 나는 다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퇴근길 목놓아 우는 것과 문득 대상 없이 화를 내는 것, 그리고 대화 중 난데없이 그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 외에 별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잘 이별하는 방법을 누군가는 알 수 있을까. 난 여전히 알지 못 한다. 설령 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것을 체득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언제고 이별을 맞닥뜨리는 것은.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다섯 권의 책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놓여 있던 책들 조차도 완독한 것이 고작 한 권인데. 그 마저도 옆에서 닦달을 하는 통에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읽고, 내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에 더 많은 책들을 샀지만 표지 조차 거들떠 보지 않은 책도 있다. 그것은 많이 미안한 일이겠지.

충동적으로 식물들을 들인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하루에 최소 한 송이씩 꽃 피우는 향긋한 나무와, 달걀 만한 화분에 뿌리를 가둔 채 여전히 잘 지내는 소형 식물도 있고 내 눈엔 물고기의 뼈보다도 미역줄기를 닮은 선인장도. 반딧불이 춤추는 듯한 독성이 있는 식물은 빛을 보지 못 해 죽어 버렸다. 죽어 버렸다. 외에도 반짝거리는 잎을 가진 식물과 강아지풀을 닮아 할랑거리는 식물도.
집에 머무는 시간과 수면 시간이 거의 차이가 없는 나에게는 어쩌면 최고의 충동구매 아니었을까.

“친구가 죽었어.”
나는 사실 아빠 직후에 네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친구는 너 다음이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턱이 굳었다고 말했고 나중에는 병원에서 일하는 다른 친구에게 메시지로 ‘시체에서 왜 눈물이 흘러? 닦아주는데도 계속 고였어’ 했다.
이별은 항상 어렵기만 한데,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을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그것을 위로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너에게도 위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언제고 나에게 위안이 되었나.


세상에 영원과 완벽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요청한 일들을 처리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잘게잘게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고 분리하면 그것을 우리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나. 없지. 무한과 무한을 더하면 또 다시 무한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무한 안에서의 유일무이.
요즘은 저녁을 먹으면서, 무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식탁은 아직 배송을 시작하기도 전이고. 아마도 생일 선물로 도착하려나 보다.

오늘의 나는 봉숭아. 조금의 힘으로라도 건들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잠들기 전 들었던 고양이 우는 소리와, 엄마와 부둥켜 안고 나눴던 대화와 급작스레 따뜻해지는 날씨의 영향이었을까.
너는 봄인가. 매번을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차가웠던 날도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면 이제 너는 ‘봄 미세먼지 많아서 싫어’ 하려나.
너와 대화하는 날들이 많아지면 곧잘 편해진다.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을 하나의 단위로 보았을 때, 최근에는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은 날이 더 훨씬 많다. 주에 한두 번. 그것도 적은 용량. 따뜻하면 잠에 들기 편안하더라고. 노곤노곤하잖아.

앞날을 장담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믿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 오래도록 이만큼 위안이 되는 존재를 만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것. 스스로에 향하는 저주는 아니고.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동시에 무덤덤하게 건네진 위로가 어떤 마음에서 행해졌는지를 안다면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고 그 무게감에 이내 포근해지겠다. 어떤 압박은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하더라. 포대기 같은 거.


별이 폭파해서 소멸되면 원자만 남는데 그 원자가 아주 우연하게 뭉쳐서 생명이 만들어진다더라 근데 사실 주변을 둘러보고 우주로 눈을 돌려도 은하단에서 은하계 행성계에서 지구까지 오면 오히려 생명체라는 게 신기할 노릇이고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수명주기라는 게 진짜 찰나에 불과한 거지
어떻게 보면 어차피 찰나인 거 잘 산다고 애쓰던 말던 티도 안나니까 뭐든 상관없을지 모르겠는데 또 뒤집어보면 기적같은 일이라서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 아니겠나
아무튼간에 얘기가 샜는데 또 달리 보면 죽음이라는 게 우주적으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라고도 하는데 근데 이게 어디 위안으로 다가오겠나
어쨌든 별이라는 것도 원자에서 시작됐다가 생명 없는 행성이 되기도 하고 지구 같이 생명 가득하기도 하고 결국은 다시 원자로 돌아가는데 그 원자라는 건 그래도 불멸이라고 하더라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원자화되어서 어딘가에 생명이 되거나 생명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면 또 영영 사라진 건 아니고 멀던 가깝던 불멸로써 형태만 바꾼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나
인간 외의 동물은 죽음을 인식적으로 생각하질 못해서 공포스럽지 않는다고 어떤 학자는 말하던데 솔직히 존나 개소리 같고 내 보기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진리를 수긍하는 지혜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여간 친구는 돌이 가루가 되어도 어디선가 다른 모습으로 있을 거고 또 다른 형태로 다른 의식으로 잘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나
물론 슬플 테지만 그만 슬퍼하라고는 못하겠고 나도 그걸 감당해 낼 상태는 아니라서 당시엔 뭐라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만 또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런 위로가 위안이 아예 안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까먹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다
과학적으로는 생명이라는 게 우연에 불과해서 살아 있을 이유 같은 거 좆도 없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오지 않을 로또라고 생각하면 또 살아보고 볼 일 아니겠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원자화되면 어디선가 또 다른 형태로 융합되어서 따로 있었던 재밌는 얘기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ㅋㅋ
잘 지내봐 우리가 우연의 연속이라면 또 어떤 우연이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토록 놀라운 일 아닐까. 고작 우연에 불과한데도 이리 위안이 된다는 일이.
올해에는 예년보다 따뜻한 생일이 되면 좋겠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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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2-16 01:02:09
어 그럼 저도 사과부탁드립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도 캡쳐해서 자기변호 시도해볼게요
익명 2024-02-14 01:00:12
고작… 그 작은게 때론 가장 큰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깉습니다
익명 / 많이요 ㅋㅋ
익명 2024-02-14 00:39:27
심오하고 슬픈 내용의 글인거 같아요
익명 / 슬펐는데요 종종 웃음도 나요 ㅋㅋ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익명 2024-02-14 00:25:39
생일이 약력이길
익명 /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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