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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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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고 살았던 이름이...
카톡 알림과 함께 내 의식을 잠식시킨다.
운전 중 이런 경우에는 신이 장난이라도 치듯 정체되던 
교통체증도 사라지며, 차로의 모든 신호체계도 초록색으로 
길이 열리는 경험을 겪게 된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주인공 짐 캐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체감상 꽤 오랫동안 확인하지 못한 체 결국 집 주차장까지
궁금증을 가져온다.

작년 이후 대화한 내역 없는 메시지 공간에 그 흔한 안부
인사도 없는 간결한 한 문장만이 눈에 들어온다.


“술 한잔할까?”

머릿속에선 별안간 온갖 상념들의 소용돌이.
곧 이은 이성과 감성의 충돌.
대화 화면을 응시하며 아무것도 못하는 이 상황은 사람을
참 왜소한 존재로 만든다.

카톡 메시지 하나에 내 의식과 기억은 서서히 침잠되고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과거의 한 지점에 도달한다.
.
.
.
.

술잔의 끝을 가늘고 긴 검지로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리는 그녀.
그늘진 표정과 초점 잃은 눈빛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한다.

“난 가끔 이런 의문이 들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환영?... 그럴지도..
일상에 지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짧고 강렬한 쾌락
만을 추구하고 잡히지 않을 환영을 쫓는 것처럼 보여.“

”차라리.. 우린 만나지 말걸 그랬어.
그럼 이 모든 쾌락도 자극도 환영도 모른 체 그냥
살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 잘 모르겠어. 나 오늘 이상하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네...”

“못하겠어..”

“내가 대신해 줘?”

“......”

“음...뭐랄까. 나쁘다고 해도 나에겐 최고였어.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 거짓에 행복한 나였었어.”
(과거형)


그렇다... 이미 알고 있기에.
냉소적인 태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체념한듯한
서정적 문장을 입술 사이로 내뱉는다.
누군가 내게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다’ 가 아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알고 인정한다' 는 뜻 임을..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서로 말없이 한참을
앉아서 장소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세기말 음악들이
귓가에 맴돌았고 서서히 밀려오는 난편함에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늦었어. 그만 일어나자”

“오늘은 가지 마...”

“......“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에 연락이 닿지도 오지도 않는 흔히 말하는
잠수를 당한 것이라 짐작한다. 아니 직감이라는 단어가
더욱 잘 어울렸을 것이다.
내겐 지우지 못할 순간들이 있었고 언제나 아쉬운 부분들
투성이었다.

두 번 다시 돌이키기 싫다고 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남아있었다.
.
.
.
.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으로 인해 과거의 회상이
깨어지고 약간의 짜증도 함께 밀려온다.

“나가실 건가요?”

오십 중후반의 나이로 추정되는 음흉한 눈빛을 가진
옆 동 대머리 아저씨가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인지
시동이 꺼지지 않은 내 차에 치근덕거린다.

“주차한 겁니다. (기대감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시동을 끄고 다시 폰을 본다.
생각해 보면 내겐 너무도 과분한 그녀였다.
같이 손을 잡고 길을 걷노라면 이슬을 머금은 화사한
카틀레야와 같이 생기 가득한 머릿결과 환한 미소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술자리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은 과하지 않을 정도의
텐션으로 늘 한결같고 그 기분 좋음은 나까지 쉽게
전염된다. (진정한 술꾼 도시 여자)

“오늘은 어떤 메뉴로 술안주를 삼아볼까? 헤헤♡~”

식욕과 주량도 대단했지만 군살 없는 몸매를
유지한다는 건 남자인 나도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식욕이 왕성한 사람일수록 성욕도 그러하다 했던가?
그녀의 만족과 뜨거운 밤을 위해 잘 먹고 운동하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듯한 규칙적인 관리.


한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이런 말을 넌지시 던진다.

“실은... 오빠보다 오빠 주니어가 더 사랑스러운 거 알아?”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ㅎㅎ”

“그냥~ 오빠꺼랑 내꺼가 이렇게 절묘하게 잘 맞는다는
사실이 놀라워. 신의 존재를 믿진 않지만 우리는 좀 더
신경 써서 맞춤으로 빚은 느낌이 들어.
그런 의미에서 이리 와봐~ 주니어 뽀뽀해 주고 싶어.“

”아아.. 공공장소에서는 제발.. ㅜㅜ
계산하고 있을 테니 화장실 다녀와~
한 바퀴 산책하면서 소화시키고 (호텔로) 올라가자.”

.
.
.
.

갑작스러운 카톡 소리에 생각의 미로에서 빠져나와
톡을 확인한다.

“우리 집 앞 늘 가던 술집이야. 올 때까지 기다릴게."

이미 그녀의 카톡에는 확인한 흔적 '1' 이 사라졌겠지...
아직도 선택의 기로에 서서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건 기다림이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껴봤기에..
오래전 증오스러운 기다림이 기억난다.
.
.
.
.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추웠다는게 기억나는 걸로 봐서는 겨울이었고, 실외였을
것이다. 나타나지 않을 그녀를 증오하며, 그녀를 증오하는
내 자신을 증오하며, 증오하면서도 증오한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루함을 증오하며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녀와 늘 가던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어떤 결심 같은 감정이 솟아오르고 증오의 끝을
보리라는 다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행했고, 결국 그녀의
투룸 문 앞에서 듣지 말았어야 할 소리까지도...

그 길로 나는 양화대교 난간에 몸을 기대고 차갑고 아득한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칼바람에 오히려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모든 게 흘러가는구나... 세월도, 사람도, 그리고
부끄러움도... 나는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터덜거리며 한강을 건넜다.

건너는 중 눈에 띄게 설치된 SOS생명의 전화기를
보고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의 일이다.
.
.
.
.

다시금 카톡을 열어 이내 결심한 듯 답장을 보낸다.

“기다리지 마.. 그리고 잘 지내.“
차단 그리고 삭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
고, 마음을 흔들고,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주고, 때로는 

절망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순환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분명 몹시 궁핍했을 것이다.

fin.





이 이야기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소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상 마호니스였습니다.
Peace!~



 
마호니스
아르카디아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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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소녀 2024-01-09 22:08:17
사랑해서 더 증오했던 아름다운 그녀가 그려집니다. 나도 그 누군가에게 그렇게 그려질까, 잠시 생각하게 되네요 ㅎ
마호니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고 그리 살아가겠지요. 사랑도, 원망도, 애증도 시간이라는 상자 안에서는 아름답게 포장되기도 하더군요. 좋았던 일만 생각하시길 ^^ 굿밤요~ (얼마전 소녀님 예술 사진 보고 몽정한 건 비밀;;)
밤소녀/ 제가 남자라도 했을거에요 ㅎㅎ
Thelma 2024-01-09 17:03:02
그녀도 되어보고 그도 되어보며 읽었어요
담담하지만 아릅답고 아프네요
잠시나마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
마호니스/ 깊이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시간여행을 하셨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셀마님만의 아름다운 기억에 다녀오셨다는 뜻이겠군요.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길..
나그네 2024-01-09 08:45:06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저라면 아마 그래도 좋다고 약속장소로 향했을 거 같은 ~~
(분홍색 꽃 그림에서 진홍빛 여성 성기를 떠올리는 건 제가 음란마귀에 씌여서 인가 봅니다. ㅠㅠ)
마호니스/ 음란마귀 아니십니다. ㅎ 카틀레아의 꽃말은 ‘당신은 미인입니다.‘ 이며, 여성의 성기와 매우 흡사하여 여성스로움의 대표 꽃이라고 하더군요. 눈이 많이 온다하니 운전 조심하세요~
라일락천사 2024-01-09 00:25:56
기억 저편에 묻어둔 그것을, 우리는 소설이라고 부르지요.
더이상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없는 그것은 소설과 다름 없습니다.

아름다운 단편 소설, 잘 읽었습니다!
마호니스/ 따뜻한 덧글 감사합니다. 소설과 우리의 삶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쩔땐 삶이 더욱 소설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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