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자유게시판
“라면 먹으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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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l Painting: Cat Nap
By Kai Carpenter, 2017




「그는 참으로 냉소적인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당신은 여자를 만나 한을 품게 할 만한 모험은 하지 않을
테니 그 점은 안심이 되겠군요”」


“이번 독서 모임에서 제가 읽어온 서머싯 몸의  「달과 6
펜스」 의 내용 중 이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뭐랄까. 여성의 심리를 알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르겠
고... 참 어렵더군요. 해당 구절의 해석이나 회원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때 모임의 초기 창설자이며 리더 누나인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흠.. 글쎄요. 제가 읽었을 당시에는 이 구절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는데요. 저의 소견은 귀납적 사고로 접근해 봤을
때 인간은 누구나 갖고 있는 어떤 역린(逆鱗)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특히 여성이 더욱 민감하고 입체적 사고를
지닌 건 사실이겠지요. 
감추고 싶은 부분이 발견되었을 때 누구보다 비참함을 
느끼고 민낯으로 드러나 숨을 공간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상태를 표현한 듯합니다.
유사한 사례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인 「보바리 부인」
에서 주인공 엠마가 결국 선택하게 되는 일련의 계기와 
과정에서 상당히 유사한 심리적 부분을 찾을 수 있었어요.
또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의 
주인공 한나는 목숨을 버릴 만큼 본인이 문맹자라는 사실
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었죠. 아마 그 부분이 트리거가 되어 
발현된 게 아닐까요?“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싸늘하다. 내가 과연 이 모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영문학 전공에 동 대학원 출신이라 소문난 그녀의 독서량
과 깊은 지식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수준인 멤버들의 보빨
아니;; 말빨에 주눅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씨.. 남자는 곧 죽어도 자신감인데 말이지!)
 
다음 달 모임의 주제로 사람들 간에 미미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내용은 타 독서모임에서도 딜레마인 책 선정과 
진행 방식이었다.
한 권을 정하여 깊이 파고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번달
처럼 겹치지 않는 선에서 각자 읽은 책을 소개하는 방식으
로 진행할 것이지에 관한.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체 아구찜으로 유명한 곳에서 뒤풀이
가 진행되었고 막내 축에 속하는 나는 이런저런 형님들과
누님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듣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
하고 있었다.
철학과 인문학등의 내용과 어느 작가의 인생 이야기가 
주된 안주거리였으며, 몇몇 지적 과시욕이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긴 했지만 늘상 있는 일이라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어지는 2차.. 3차까지 남은 인원은 누나, 등치 좋은 동생
그리고 본인 세 명이었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나는 고민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
고 모임의 팀장 역할인 누나는 별일 아닌 듯 내게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뒤풀이 때는 내게 늘 편하게 반말을 날리신다 ㅎ) 

“본래 이런 유형의 모임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곳이야.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가장 
다양한 종류의 어류와 미생물들이 공존하거든. 
나는 이 모임이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적당히 무시해.
어차피 인간은 인간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더라.“

어느덧 이야기 중에 멤버 한 명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아! 동생이 대화 방해하고 싶지 않아 톡 하나 남기고 귀가
했네요. 슬슬 마무리할까요?”

“그래. 그런데 2, 3차 계속 느낀 한 걸 먹어서인지 얼큰한
게 땡긴다. 편의점 끓이는 라면 먹으러 갈래? 누나가 쏜다.”

“한강에서 먹어야 제맛이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가까운
곳으로 가시죠! 라면은 제가 끓여 대령하겠사옵니다. ㅎㅎ“

야외에서 라면과 맥주를 마시기 딱 좋을 6월의 날씨 그리
고 늦은 밤 시간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는 그녀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내용을 주고받았으
며, 많은 것을 얘기한 것 같은데 귓속에는 우리의 대화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머릿속으로 옮겨질 때는 몇 개
그리고 머릿속에서 마음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없어져 버렸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자극적이면서 본능적
인 대화 이외엔 모두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시간까지 있기는 처음이네~ 늦어도 괜찮아?” 
라는 그녀 말에 저는 괜찮지만 누나는 어떠냐고 하니 

“어차피 내 상황 얘기했잖아. 쓸데없이 자유롭고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 고 하신다. (아?!.... )
.
.
.
.
.
.
.
.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모텔.

침대 구석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훌쩍이는 나... 
는 농담이고 앞으로 누나를 어떻게 봐야 하지? 모임은 
이제 나가리인가? 하는 근심 어린 표정을 그녀에게 들킨 듯
하다. 그녀는 예열을 마친 전자담배의 진동을 느끼고선
한 모금 깊게 호흡한 뒤 이런 말을 한다.

“넌, 인간이 머리로 사는 거 같지? 아니야. 인간은 말이야, 
본능으로 사는 거야.”

역시 배우신 분(?) 답다.
한 사람의 자유로운 영혼과 해방된 표현력에 강렬한 매력
을 느꼈고 역시 술과 섹스는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재차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몇 번의 독서 모임이 진행되었고
지식의 습득만큼 섹스 스킬(?) 또한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새로운 자극을 탐닉 후 침대에 나란히 누워 후희를
느끼는 중 불현듯 그녀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기는 나랑 있는 것보다 젊은 애들이랑 놀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음... 여자들의 나쁜 점만 다 가진 존재. 그게 바로 어린 
여자예요."

"그래?"

"날카롭고 까다롭고 어린애처럼 바라는 것이 많죠. 
심지어 저녁 메뉴를 고를 때도 본인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
모른다며 저에게 알려달라는 걸 보면...
하지만 누나는 달라요. 여성의 좋은 점만 가지고 있어요. 
따뜻하게 안아주고 남의 말도 잘 들어주고 무언가 균형 
잡혀 있다고나 할까?“

”넌 날 모르는구나. 앞으로도 모를 거고, 또 몰라야 해. 
미안하지만 말이지...“

그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몰랐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녀 입장에서는 남자들의 나쁜 점을
가진 존재는 바로 ‘미성숙한 연하의 남자’라는 사실을... 
철없고 불안정하고 즉흥적이며 어린애와 같이 의존적인 
피터팬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그녀보다 생각이 어린 남자인 나는 그렇게 서른 후반대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찬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했고 그 무렵 그녀는 
개인적인 이유로 모임을 그만두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대화 후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그녀와의 
관계가 냉랭해지던 때이기도 하다.
독서모임은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한 구성원에게 승계되
었으며 몇 번의 모임이 더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마치 농구
나 배구 등의 단체 운동에서 주장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서인지 더 이상 모임은 유지되지 못하였고 마지막 모임을
끝으로 밴드방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모임의 마무리는 결코 젠틀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카리스마와 존재감이 이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던 것이다.
.
.
.
.
.
.
.
.

언젠가 펜션 여행 중... 
그날 밤 침대에서 그녀는 내게 귓속말로 속삭이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Frei Aber Einsam."

그리고 깊은 입맞춤과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나의 
형용할 수 없는 리비도를 일깨워준 경험의 그날 밤은 유독 
짧게만 느껴졌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수놓은 밤하늘은 
아마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현재 그녀는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느 누구네 인생에 개입
하여 철학적, 육체적 사고의 틀을 해방시켜 주고 있을지,
또한 인생의 길을 나보다 몇 걸음 빠르게 걷고 있을지 모르
지만 분명한 건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부터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부디 그녀가 행복하길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fin.




이 이야기를 끝으로 트릴로지로 구성된 남자들을 가장 
설레게 하는 말들 시리즈를 마칩니다.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을 재조립하여 매끄럽게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왕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도 지어보자!” 라는 사명감(?)
비슷한 생각이 들어 마무리하게 됐군요.
(저에겐 매우 뜻깊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이디어와 자극(?)을 주신 한 여성 회원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재미가 있든 없든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상 마호니스였습니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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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커피 한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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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술 한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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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cooooool 2024-03-04 18:09:11
잘 읽었습니다. 시리즈가 끝나니 아쉬워요. 에필로그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plz
마호니스/ 서툰 저의 글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유로운 다양한 이야기들로 찾아뵐게요. ^^;
나그네 2024-03-04 08:23:46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고 숨막힐듯한 긴장을 놓치지 않게 만드는 글~~ 감탄하고 갑니다^^
마호니스/ 과찬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완연한 봄날이네요. 다음엔 또 다른 스토리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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