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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정담] A의 이야기 - 헤어지기 전에 한번만..  
5
 
A는 그날 밤 집에서 뒹굴거리며 한 코미디 프로를 보는 중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꼬집는 게 주요 테마인 어떤 코너 차례가 되었는데, 그날의 주제는 '헤어질 때 남자들이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 베스트 쓰리~!' 였다. 꽤 인기 있는 코너인지 관객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를 헤프게 내뿜고 있었다.
 
'자~ 시작합니다. 그 3위, 우리.. 그냥 친구로 남자. --- 아니, 헤어지면 헤어지는거지 친구는 또 뭐래. 왜? 딴 여자랑 사귀다가 또 질리면 돌아오려구? 여자가 무슨 똥개니, 아무때나 돌아오면 멍멍멍 하며 꼬리 흔들게?? '
 
'2위, 나..사실은 유학간다. --- 뻑하면 유학이래. 지가 무슨 텔런트야? 글구 유학 간다던 놈이 이태원 나이트에선 왜 걸려? 텍사스로 유학간다던 놈이 왜 미아리에서 눈에 띄냐구~ 아항..이제보니 텍사스가 그 텍사스였구만? '
 
'그럼 이제 대망의 1위는..!'
 
그 전까지 낄낄 대며 웃던 A 는, 그러나 막상 1위가 발표되자 더 이상 웃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A가 그녀를 만난건 대학교 2학년때였다

그녀는 A와 절친한 과선배와 소개팅을 하러 나왔고, 그는 소위 초콜렛을 팔기 위해 따라 나섰다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술집에서 작고 귀엽고 예쁘장한 그녀에게 그는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는 얼른 이만 꺼져주시라는 선배의 압박을 참고 견디며 그 자리에 눌러 앉아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후, 그녀의 애프터 신청은 A의 선배가 아닌 A에게로 오는 사태가 발생해 버렸다.
 
A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사실 그대로를 선배에게 고백했다. A와 선배는 진지한 침묵 속에 빠져 들었고, 잠시 후 선배는 아주 무겁게 한마디를 뱉었다.
 
'너.. 걔 행복하게 못해주면 나한테 맞는다..'
 
A 는 순간 형의 그 남자다운 아량에 감동해 버렸다. 저 상황에서마저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그 따뜻한 가슴에 뛰어 들어 '아 형 씨발..나를 용서해' 하며 흐느끼고 싶어졌다. (선배의 저 대사는 나중에 '약혼자'를 빼앗긴 남자와 뺐는 남자가 나오는 한 3류 드라마에서도 보게 되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아우 저게 뭐야..’ 하는 반응을 접하고야 그 대사의 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었다.)
 
뭐 여튼 중요한건 A가 감동했고, 이젠 마음 놓고 그녀를 만날수 있게 됐음에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와 그녀는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에겐 6년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다

본격적인 그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으므로 그녀가 A를 만나기 이전 이야기 하나를 옮겨야겠다.
 
그녀는 A 를 만나기 직전까지 어렸을때부터 6년여를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애인이 군대를 가기 며칠전 그녀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우린 같이 자야한다, 그래서 너와 나는 더욱 깊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 하더랜다. 그러면서 그 애인은 그 또래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끝까지 거부하면 나와 더 이상 사귈 생각 없는걸로 알겠다' 는 조잡한 협박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펑펑 울면서 결국 그의 집에서 돌아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둘은 정말 끝이 나 버렸다.
 
그렇게 소심하고 어린 여대생이었던 그녀는, 그러나 막상 A 와는 당연한 순서를 밟는 것처럼 간단하게 '첫날밤'을 결심하고 행동에 옮겨 버렸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로선 이해하기 복잡한 여자의 심리라고 A는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게 사귄지 한달여만에 그는 그렇게 그녀의 '첫남자'가 되었다.
 
이제 막 성에 눈을 뜬 어린 남자와 여자가 의례 그렇듯이, 일단 같이 자고 난 후의 둘의 관계는 '몸'을 중심으로 발전 되었다. 데이트의 필수코스로 늘 모텔이 포함 되었고, 꽤 능숙한 톤으로 '아줌마 숏타임이요' 라고 외치며 대낮의 모텔을 들락 거렸다. 단골로 가던 비디오방은 늘 그들에게 가장 구석방을 내주었고, 추억을 쌓자며 동해에 가서는 바다는 구경도 못하고 48시간을 뒹굴다가 돌아오는 일도 종종 반복 되었다.
 
그리고 점점 대범해지던 그들은 차안, 캠퍼스 구석, 빈 강의실 등등으로 실내와 야외를 가리지 않고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그 와중에 A 는 자신이 이러다가 야외에서밖에 가능하지 않는 변태가 되는거 아니냐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년후, 더 이상 '젊지 않은' A는 이제 좀처럼 침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매일마다 꾸준히 써오던 그녀의 일기장을 그녀의 어머니가 훔쳐 보는 대형 사고가 터져 버렸다. 당연히 그 일기장엔 A의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고, 페이지마다 '문란한' 그와 그녀의 행적이 변명의 여지 없이 꼼꼼하게 기록 되어 있었다.
 
충격에 빠진 어머니는 즉각 A의 호출을 명했다. 그렇게 '순결'을 잃어버린 딸과, 한국에서 딸을 기르는 평범한 어머니와, '딸을 베린' 잔뜩 긴장한 청년 A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셋은 과거 반성과 향후 발전을 위한 삼자대담의 시간을 갖기 시작 했다. 아무도 정확하게 '섹스'라던가 '육체관계'라던가 하는 단어를 감히 뱉지 못하고 은유와 비유가 난무하는 희한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그..왜..그거 그러면 안되는거 알만한 사람이 그런.. 그러고 그랬어.. ' 식의 정체를 알수 없는 모호한 힐책과 그만큼 애매한 변명이 오고갔던 그 자리의 민망함과 갑갑함을 A는 아직도 울먹이며 회상하곤한다.
 
그 장시간에 걸친 서로 난감한 설교와 매우 강력했던 위협의 시간은, 그와 그녀의 붉어져 버린 얼굴이 봉선화처럼 터지기 직전에야 간신히 끝이 났다. 그와 그녀는 결국 살아 남았고, 그런 서로의 생존을 축하해주기 위해,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서로 위로 해주기 위해 근처의 공원으로 단둘이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앞으론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던 약속이 공중에서 채 흩어지기도 전에, 바로 그 둘은 대낮 공원 벤치에서의 위험한 섹스를 '저질러 버렸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하는 한국 부모 세대에 대한 작은 반항이자, 보수적인 한국의 성문화에 대한 약한자들 나름의 저항....이었던게 아니라, 단지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은 너무나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할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불타는 청춘들이었다는 얘기다.
 

영화는 끝나고 관객들은 일어서야 하는 법

당시로선 그들의 그 ‘탐험가스러운’ 애정행각은 끝이 없을 거 같았다. 그러나 언젠간 영화는 끝나고 관객들은 일어서야 하는 법.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 그들이 이 땅위에선 이제 정복하지 못한 곳이 없노라고 아쉬움 가득한 선언을 하게 되었을 때쯤 그들의 열기도 어느덧 식어 버렸다.

다른 연인들의 영화 보고 밥먹고 그냥 헤어지는 데이트를 '저것이 진정한 변태짓'이라며 손가락질 하던 그들이 이젠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때맞춰 A는 어떤 일에 깊히 집중하게 되었다.
 
이제 A는 바빠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을 만나던 그들이 일주일에 한번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매일 밤을 새던 그는 피곤한 채로 그녀를 만났고, 졸면서 데이트를 했고, 그녀가 그런 그에게 투정을 부리면 같이 화를 내고 헤어졌다. 그가 일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녀의 투정은 심해져 갔고 그만큼 그들의 다툼도 잦아졌다. 평범한 청춘이었던 그와 그녀는 그야말로 평범하게도 그런 다툼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A 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하겠다는 결심을 한 채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만의 즐거운 데이트를 각오하고 나왔는지, 그날따라 더욱 예쁜 모습으로 단장하고 밝은 웃음을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예상도 못한 천진한 얼굴로 대하는 그녀에게 차마 A는 준비했던 말을 할수가 없었다. 어느 우중충한 까페에서 몇번의 망설임 끝에, 만난지 몇시간만에야 그는, '우리 두달만 만나지 말아보자' 라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통보를 그녀에게 머뭇거리며 건넸다.
 
'우린 헤어지는게 아냐.. 두달쯤 뒤에 서로의 중요성을 느껴본 후에 다시 시작하자는거지..' 말하는 A도 그녀가 그 뻔뻔한 거짓말을 믿을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린 헤어지는게 아냐.. 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 뿐이야..' 비슷하게 뻔한 거짓말도 어떤건 이렇게 고상하고 어떤건 저렇게 후질 수밖에 없는가.. 그는 그 와중에도 한탄하며 괴로와 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여자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속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착잡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그녀의 우는 모습을 달래주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자리를 일어섰을 때, 그들은 곧 과거가 되어버릴 지금의 이 아픔을 딛고, 이제 각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전진해 나가리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행복을 빌며 그녀가 타고 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라고 이야기가 끝난다면 A에게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비록 심플해서 밋밋한 엔딩일망정, 겨우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A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 같은건 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말이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와 '하고 싶다'의 차이

말 없이 눈물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던 A 는, 황갈색 조명빛 아래에서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그녀의 목덜미를 보다가 '그녀와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버린다. 그제서야 이제 앞으로 그녀의 하얀 속살, 그 은밀했던 몸짓들과도 영원히 이별이라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어지고 싶지 않다' 와 '하고 싶다'의 차이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그 끔찍한 차이를 자각하는 남자는 차마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허덕인다. 그리고 갈망이 진해질수록 그의 머릿속 신경줄은 팽팽해져갔다. 잠시 후 모든 신경이 스프링처럼 튀어 헝클어져버린 뒤에, 그는 결국 ‘미쳐’ 버렸다. '그녀도 나와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자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는 생각 따위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녀를 태워 보내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결국 그는 하지 말아야 했다고 그 후로 계속 후회하게 될 이 말을 꺼내게 된다.

 
대망의 1위

'대망의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헤어질 때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 그 1위는~~~~ 널... 헤어지기 전에 한번만 더 안아보면 안될까..? --- 우웩, 뭐야? 막상 헤어지려니까 아쉬워? 마지막이라니까 더 흥분돼?? 뭐야뭐야뭐야, 어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럼 미아리나 가시지~!! '
 
 그가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가로 저을때, 그녀의 눈에는 멈췄던 눈물도 다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의, 착잡함과 서글픔이 뒤섞인 마음 쓰린 눈물이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얘기이며, 자신이 그 말을 던진 그 순간 아주 많은 것들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상처입고 훼손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순간 도로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절박한 수치심과 자기 모멸감을 느꼈다.
 
영원히 오지 않을거 같던 버스가 겨우 도착했다. 그녀는 예의 그 서글픈 표정을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남자는 차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볼수 없었다.
 
그로부터 두달 후, 물론 그는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영영 헤어졌고 그 이별의 장면은 그의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쉽게 잊혀져 버렸다. 최소한 지난 몇년동안은 떠오르는 일 없이 잘 살아왔었다. 
 

그래서 A는 웃지 못했다

티비에선 대망의 1위를 정점으로 관객들이 박수치고 웃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웃지 못한다. 함께 마음 아파야 할 그 이별의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린 자신의 욕망에 대해 다시 한번 수치심을 느꼈고, 그 욕망이 공공연히 베스트 1위 운운할만큼 통속적이었다는 것에 새삼 황망해져버린다. '그와 그녀만의' 것이었을 그 모든 것들마저 그 한마디에 의해 함께 무너져 내린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지킬 수 있었을 것들을 지키지 못하게 만든 자신의 그 개같던 갈증에 그는 다시 한번 진저리를 쳤다.
 
남자는 그 코너가 끝난 후에도 잠시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 그 앞에 그녀가 서 있다면 그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훼손시킨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절실하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녀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A는 아무쪼록 그녀가 그 코미디를 보지 않았길 바라며, 봤더라도 그 날을 떠올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떠올렸더라도 다시 한번 옛상처가 건드려지지는 않았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천번쯤 되뇌었을때야 그는 겨우 지쳐 잠이 들수 있었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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